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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미대생들여, 깨어나라!

- 어느 서울대 교수의 외로운 투쟁 -

2000.10.09. 월요일
딴지 논설우원 최가박당

 

 '예술과 기술이 머가 다르지?'

위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쉽게 말해 조각가와 구두 만드는 기술자가 뭐가 다르냐는 생각 말이다.

 
아따.. 피터져 부는게
절라 예술이구만.


예술적 행위에 대해 쓴다고 믿어왔던 '미학(美學)'이라는 말도 요즘엔 아무 데나 막 쓰이고 있다. 술의 미학, 자동차의 미학, 화장품의 미학, 광고의 미학 등등... 심지어는 폭력의 미학까지도.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이 타당하게 쓰일 수 있다면, 조폭들의 사람 패는 기술도 예술이라 주장할 수 있는 셈이다.

실상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즉 예술과 평범한 기술을 나눌 수 있는 명확한 잣대는 없다. 오늘날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위대한 예술가들, 예컨대 하이든과 같은 음악가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미술가도 그들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저 미천한 '기술자'였을 따름이었다. 귀족들의 연회에 쓰일 음악을 만드는 게 주임무였던 하이든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레스토랑에서 오디오 기기 만지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미켈란젤로는 극장의 광고판 그리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하이든의 음악과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기술'이 아닌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대중들에게 납득되는 데까는 기나긴 역사적 과정과 더불어 음악가나 미술가들이의 눈물겨운 투쟁 과정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술이야 원래 예술이지, 무슨 예술가가 민주투사라고 투쟁까지 하고 그러냐구?오늘날 우리가 쓰는 '예술'이라는 말은 그 시초를 아무리 멀리 잡아도 17세기 이상으로 거슬러 가지 않는다는 사실, 대부분 독자들은 첨 듣는 얘길 거다. 이 시기 유럽의 예술가들은 중세유럽의 봉건적 직업시스템인 길드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예술의 이름을 쟁취할 수 있었다라는 건 더더욱 그럴테구.

자.. 그럼 유럽역사에서 예술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됐는지 함 보도록 하자.  
 

 16-17세기 유럽 미술 아카데미의 투쟁 :
 
기술이 예술이 되기까지

중세 유럽의 미술가들은, 좋게 말하면 '노동 조합',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조폭 시스템인 길드(guild)에 소속되어 일했다. 이들이 길드의 체제에 반항한다는 것은 스스로 밥줄을 끊어먹는 자살행위에 해당했다. 

그러나 근대적 의식을 갖게 된 미술가들은 차차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단순히 빵을 만들거나 구두를 제작하는 것과는 다른 일종의 '정신적인 활동'을 수반하는 자유로운 행위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미술가들이 사회의 구석탱이에 처박혀 봉건적인 도제 시스템 속에서 스승들의 치닥거리나 하면서 단순 노동에 시달리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마침내 그들 미술가들은 과감히 길드 체제를 거부하고 뜻맞는 동지들을 모아 미술 아카데미를 창립하게 되었으니, 그 첫 발자욱은 이태리 플로렌스의 미술가 동맹 <Academia del disegno>가 발족된 1562년에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자유로운 정신적 활동'의 일부임을 당시의 보수적 대중들에게 새롭게 입증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술 아카데미에 미술가가 아닌 이론가들을 흡수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미술이 '정신적 활동'일진대 미술 활동의 의의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고 그 이론의 자극을 받아 미술 활동을 더욱 차원 높은 세계로 비상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이렇듯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미술가 동맹이 당시 봉건적 길드 체제와 부딪쳐 투쟁한 역사는 실로 눈물겹다. 길드에 소속된 수구 '환쟁이' 세력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놓칠세라 미술 아카데미를 해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길드의 동지들이 똘똘 뭉쳐 일거리를 독점해 버림으로써 소수세력인 미술 아카데미 소속 미술가들의 밥줄을 끊어놓는 것이었다. 결국 이태리의 미술 아카데미는 얼마 못 가 길드 체제의 강력한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타오른 근대 정신은 미술 아카데미의 창립 정신을 뒷받침해주었다. '예술가의 자유'에 대한 미술 아카데미의 요구는 당시 시대 정신의 일부로서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던 거다. 이태리에서의 실패를 딛고 미술 아카데미 운동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결국 힘겨운 투쟁 끝에 미술 아카데미는 마침내 길드 체제에 맞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고, 17세기와 18세기를 거쳐 '예술'을 성립시켜 냈던 것이다.

  한국의 미술계 : 길드 체제로의 퇴행

유럽 근대의 미술 아카데미가 수세기에 걸쳐 투쟁한 역사의 산물이 오늘날의 미술 대학이다. 근대 유럽에서 벌어진 미술 아카데미의 기나긴 투쟁이 없었다면, 오늘날 예술가, 혹은 미술가는 한낱 기술자로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번 강조하는 얘기지만, 한국 사회는 일제시대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유럽에서 이루어낸 알짜배기 근대 정신이 철저히 왜곡된 형태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 짜가 근대의 왜곡된 양상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분야가 한국의 예술계로서 한국의 소위 고급 예술가들은 서구 근대가 피땀흘려 이루어낸 결과물인 '예술가의 지위'만을 넉살 좋게 삼켜먹고는, 파렴치하게도 그 높은 지위에 앉아 한가하게 천박한 기술자 노릇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게 울 나라 예술계의
적나라한 현주소란 말이쥐.
 

한국 예술계에서 보여주는 짜가 음악가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본 기자 이미 수차례 밝혀낸 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한국 미술가들의 행태를 보면 그 양상이 짜가 음악가들과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 술 더 뜬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의 미술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중세 유럽의 길드 체제 환쟁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도제식 기술 전수와 다름 없다.

현재 한국의 미술 교육은 철저히 봉건적 기술 세습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교육은 스승의 위치에 올라선 무리들에게 과도한 권위와 권력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권위와 권력을 독점한 이들은 주로 '미술대전'과 같은 권위 있는 미술대회의 심사위원이 되어 미술인들의 밥줄을 움켜쥐고 있다.

해방 후 일제시대의 '선전'을 무반성적으로 계승한 '국전'은 초창기부터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이라는 두 계파 간의 이권 다툼의 장이 되었고, 이 두 계파가 각각 홍대파와 설대파로 발전하여 미술계를 완전히 무림계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모습때문에 미술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발족에도 불구하고, 국전의 심사위원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운영위원이 선출하는 '결탁'으로 인해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전을 위한 미술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박통 사후에 이 문제를 개혁해보겠다고 '국전'을 '미술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달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시점에 터진 '미술대전 입상자 심사위원 매수 사건'<관련기사>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 사건은 사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에술 이념상의 대립도 아니고 해방 후 50년이 넘도록 철저히 학연과 이권 싸움으로 점철된 한국의 미술계가 지금 어떤 꼬락서니일지에 대해선 독자 열분들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거다.

결국 한국 미술 교육계의 스승들은 '미술은 곧 테크닉일 뿐'이라는 깡통같은 사고를 가지고 자신의 제자들을 철저한 '무뇌아'로 만들고 있으며, '예술가의 정신적 자유' 따위는 오래 전에 뇌염모기 하품하는 소리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한국의 미술 대학은 근대 유럽의 미술 아카데미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길드 체제를 답습하고 있는 거다.

 


  김민수 교수의 외로운 투쟁

오래들 기다리셨다. 이제야 본 기사의 본론으로 들어왔다.

최근 위에서 서술한 한국 미술계의 무뇌아적 사고가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1998년 당시 서울대 미대 산업디자인과에서 디자인 이론과 비평을 담당하던 김민수 교수를 재임용 심사 과정에서 탈락시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다행히도 김민수 교수 재임용 탈락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각종 언론에서 지지를 받아온 데다 법정의 1심 공판에서도 김 교수의 손을 들어준 터라 본지가 나서지 않아도 조만간에 해결될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역시 설대 미대는 육갑자 언론들의 씨부림 따위로는 범접할 수 없는 십갑자 이상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정의보다는 힘 있는 넘 편에 서는 걸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법원이 지난 8월 31일에 있었던 2차 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다시 학교측의 손을 들어줬던 거다. 이에 본지가 분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독자 열분덜은 일단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거다.

'교수들 철밥통이라는데 무능한 교수에 대해 공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탈락시켰다면, 그건 학생들을 위해서나 유능한 신임 교수들의 강단 진출을 위해서나 좋은 일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렇다. '공정한 심사 과정'이란 게 보장될 수만 있다면 그렇다. 근데 울 나라에서 철밥그릇 교수 직위를 놓고 '공정한 심사 과정'이 이뤄질 것 같은가. 사립 대학의 경우 이 제도는 무능 교수 퇴출보다는 재단에 반항하는 의식 있는 교수들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게 현실이다. 국립대학의 경우는 재단이 없으니 재단에 반항하는 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어차피 '공정한 심사'가 불가능한 판국에 괜시리 재임용 탈락 사건이 발생하면 골치만 아프니까 공무원 생존 전략 제1원칙에 따라 '복지부동 있으나 마나 재임용 제도'로 운영해 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재임용 심사가 시작되면 연구실적의 200%(1인 연구 또는 편찬은 100%, 2인 공동연구 또는 편찬은 70%... 하는 식의 규정이 있다. 쉽게 말해 논문 2편 내면 200%가 된다)를 당사자가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심사를 받는 교수가 연구 많이 했다고 논문 대여섯 편씩 가지고 와도 담당자들이 귀찮아 하면서 두 편만 쏙 빼가는 정도다.

그러나 설대 미대 교수들이 누군가.

그들은 공무원이 아니라 조폭임을 자랑스럽게 선언하였다. 대학의 이사장은 없으되 조직의 우두머리가 있고 조직의 질서가 있는 법. 당연히 반항은 금물이다. 설대는 망설임없이 김민수라는 이름을 가진 역적 나부랭이의 목을 덜커덩 짤라낸 거다. 김민수는 3차에 걸친 심사과정 동안 무려 800%의 연구실적을 제출했지만, 조직을 배반한 죄를 씻을 수 없었다.

김민수 교수가 짧은 4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에도 조직에 크게 밉보일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디자인 분야에서 선구적으로 이론 전공 박사 학위를 따낸 김 교수는 대부분 디자인 실기 분야에 종사하는 선배 교수들이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디자인 비평' 영역을 개척해가면서 조직원의 심기를 괴롭혔다.

그가 개설한 '디자인과 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의는 미술사와 문화사를 포괄할 뿐만 아니라 문학과 사회학까지 아우르는 디자인 미학 수업으로서 매 학기마다 400여명의 수강생이 그의 수업을 들을 만큼 인기 과목이었다. 그가 최근 의식 있는 미술 이론가들과 손잡고 창간한 무크지 <디자인 문화 비평>지에 직접 쓴 창간사를 보면 그의 디자인에 대한 생각과 활동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미지 시대는 인간 지식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문화적 저항과 재생산에 참여하는가의 이른바 '양방향 다층적 학문'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론과 실제, 개념과 현상이라는 종래의 이분법적 학문 구분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 유일한 길은 예술, 인문학, 과학과 기술의 전통적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통합학문적 학제간 연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묵묵히 조직에 봉사하며 암 생각 없이 '기술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미대 교수들에게 김민수의 이러한 생각은 그야말로 모가지에 걸린 가시와도 같은 거였다.

설상가상 김민수 교수가 결정적으로 조직의 비위를 거슬리는 결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1996년 당시 미대 주최로 개교 50주년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여기서 김민수는 <서울대 미술대학의 디자인/공예교육 50년사 : 1946-1990년>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발표가 끝난 후 일부 미대 교수들이 이 논문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는데 이유는 김민수 교수의 논문에 설대 미대의 초기 교수진 가운데 몇몇 교수가 친일 활동에 가담한 사실이 있다는 기존의 연구 결과를 각주에 인용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를 제기한 교수들의 입장이란 한 마디로 조직의 초기 보스를 욕보이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거였고, 결국 그들은 김민수 교수에게 문제의 각주를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김민수 교수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대 측은 심포지엄 내용을 정리한 미대 학술지 <조형>지에서 해당 논문을 빼 버렸고 김민수 교수가 이 날 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조차 적시하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조직을 배반한 무엄한 조직원에게 돌려주는 당연한 대가였다.

그러나 조직의 쓴맛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2년 후 재임용 심사과정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김민수 교수를 제거한 거다.
 

 한 편의 코메디 :김민수 교수에 대한 <연구실적 심사보고서>

아직도 김민수 교수에 대한 재임용 심사가 '공정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의심할 독자들을 위해 당시의 심사위원들이 작성한 <연구실적 심사보고서>를 부분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자.

문제의 <연구실적 심사보고서>가 매우 부당한 심사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인하대 미술교육과의 성완경 교수와 서울대 국문과의 권영민 교수가 각각 작성한 '<연구실적 심사보고서>에 대한 감정서'에 이미 밝혀져 있다. 본 기사에서는 이 <연구실적 심사보고서>를 전반적으로 다룰 수는 없으니 1차 심사 과정에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중 일부만 살펴보자. 사실 정신 멀쩡한 독자라면 일부 내용만으로도 이번 심사가 불공정했다는 점은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거다.

(참고로 설대의 교수 재임용 연구실적 심사 과정에 대해서 간략히 알려드리자면, 심사대상이 되는 실적물에 대해서 세 명의 학내외 인사들이 '수-우-미-양-가'로 평점을 내리는데, 세 사람의 평점을 평균냈을 때 '우' 이상이 되지 않으면 그 연구실적물은 불합격 처리된다.)

1차 심사 때 김민수 교수가 제출한 연구실적물은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라는 책과 <21세기 한국 디자인 교육의 대전제>라는 논문이었다. 다음은 이 두 연구실적물에 대해 각각 '미'와 '양'이라는 평점을 매겨 재임용 탈락에 현격한 공을 세운 심사위원 C의 심사보고서 가운데 일부 내용들이다.(이미지들을 클릭하면 전체내용이 뜰 것이다. 또는 여기를 클릭해도 된다)

먼저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에 대한 심사내용 가운데 일부다.


"저자는 여기서 결론적으로 우리의 기업은 외국 것을 모방하고 심지어 외국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일을 사대주의로 몰아세운다. 그래서 논평자 자신은 애국자인양 의기양양해하는 심리가 깔려있다. 마치 외제 자동차 타고 다니는 사람은 뭔가 못마땅해 보이며, 주체의식이 없어보이며, 마음 편치 않는 (?)없는 뒤틀린 심사를 노출하는 사람의 심리와 유사한 논조로 보인다."


보시다시피 이 분은 연구 실적물을 심사하랬더니 김민수 교수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 분이야말로 뭔가 '편치 않는' 기분으로 '뒤틀린 심사를 노출'하고 있는 듯하다. '총평' 부분의 내용을 덧붙여 읽어보자.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는 전혀 21세기의 문화 탐사가 아니다. 이 책은 1997년에 시판된 책으로서 디자이너들에게 읽히고 있는 보통의 디자인 참고서적 이상의 것은 아니다."


이 분의 탁월한 통찰력에 의하면 90년대에 21세기를 논한 먹물들은 찌그러지셔야 한다. '1997년에 시판된 책'도 21세기를 논할 자격이 없는데, 행여 96년 이전에 21세기를 논한 뇬넘들이 있다면 각자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아비판 열심히 할 지어다.

이 분은 김민수 교수가 쓰는 '21세기'라는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이 분이 작성한 두번째 보고서, 즉 <21세기 한국 디자인 교육의 대전제>라는 논문에 대한 보고서의 일부를 보자.


"둘째 21세기에 대한 진단이 전혀 없는 채 막연히 21세기 한국 디자인을 전제한다는 것은 만용이다. 연표적으로 2001년이 21세기의 시작이라면, 21세기적 특성은 적어도 2010-20년부터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한국의 상황을 적어도 예측한 전제 위에서 우리의 디자인 교육의 방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19-20세기 디자인 교육이 이러했으니 21세기는 이러해야 할 것이다. 라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여러분들 잘 알겠는가? 21세기는 '2010-20년부터' 시작하는 거다. 이 분의 날카로운 예언력에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는가.


"디자인 교육이라는 것이 이렇게 한가한 언어유희에 의해 개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심사위원 C는 이 보고서의 결론부에서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그가 김민수에게 말하려고 했던 바의 핵심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김민수 교수의 활발한 이론적 활동이 못마땅하다는 것. '시끄럽게 이론 나부랭이를 떠들어대지 말고 조직에서 나가라!'는 소리다.

  미대생들이여 깨어나라!

사실상 김민수 교수가 설대 재직기간 동안 쌓아온 연구 실적물은 이미 미술계와 학계 전반에서 크게 인정을 받은 것들로서 그 실적물들을 통해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 가능 여부'를 저울질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예컨대 1차 심사 때 제출한 그의 저서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는 학계와 언론의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97년도에는 월간 <디자인>이 선정한 '올해의 디자인상'까지 받았다. 또한 2차 심사에 제출했던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본 李箱 시의 혁명성>은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와 예술계 전반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 학술지에 게재되었을 만큼 국제적인 학술 가치를 인정받은 논문이다.

김민수 교수는 자신의 재임용 탈락이 부당하다며 지금 이 순간까지 법정 투쟁을 불사하고 있지만, 서울대 본부측은 '행정적으로 문제 없다'는 식의 형식적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미대 측은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4.19이래 처음이라는 300여명의 서울대 내부 교수들의 김민수 교수 복직을 위한 서명이 있었고 뜻있는 교수들이 학자적 양심을 걸고 김민수 교수의 학문적 성과를 입증하는 소견서를 제출함으로써 법정의 1심 공판에서는 승소했지만 2심 공판에서는 다시 '행정적으로 하자 없다'는 판결과 함께 패소했다. 이제 이 사건은 3심 공판을 앞두고 있지만 그 전망이 불투명하다.

본 기자 이 사건에 대해 나름의 사명을 가지고 추적 조사해본 결과 김민수 교수의 복직과 명예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참담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대생들의 침묵' 때문이다. 현재 설대 학생회에서 조직되어 있는 '김민수 교수 복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조차도 위원장 외에 조직원들이 모두 미대생이 아닌 타과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대생들 스스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김민수 교수의 복직을 위해 노력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설대 산업디자인과 홈페이지에 가봐도 '김민수'라는 이름조차 거의 거론되지 않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설대 미대가 아닌 다른 미대생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설대 미대생, 아니 울 나라의 모든 미대생들에게 말한다. 지금도 열심히 무거운 화구를 들고 어둠침침한 화실에 갇혀들어가 기름때 묻은 손으로 작품에 몰두할 그대들이여.

처참한 백수가 되어버린 선배들의 면면을 보며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불안감에 허덕이는 그대들. 그대들의 쥐구멍 같은 미래에 햇빛이 들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대들의 알량한 스승들이 휘두르는 권력에 달려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대들에게 현실적으로 와닿지도 않는 골치아픈 이론 선생의 명예회복 문제 따위는 눈앞에 닥친 그대들의 과제물을 평가하고 그대들의 가치를 점수매겨줄 실기 교수들의 무서운 권력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찮은 일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미대생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예술가이길 포기하려는가. 그대들의 침묵은 그대들 자신이 스스로 한국 미술계라는 거대한 조폭 시스템의 똘마니임을 증명하는 행위다. 지금 그대들의 모습은 순박한 '기술자'의 모습도 아니다. '예술가의 자유'를 부르짓는 고독한 목소리를 짓밟고 찢어 발기는 야만적 폭력의 현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보스의 뒷편에 열지어 늘어선 조폭 똘마니들의 모습일 뿐이다.

기술이 예술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지만, 예술이 기술이 되는 과정은 편리하다. 조직의 안락한 품에서 세계와 현실에 대한 아무런 통찰도 없이 눈앞에 있는 밥그릇만 허겁지겁 챙기는 것. 미술 아카데미에서 환쟁이들의 길드로! 그대들의 이기적이고 편리한 삶이 그대들이 믿는 '예술'을 '기술'로 퇴행시켜 놓는 건 시간문제다.

그대들. 예술가가 되길 원하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김민수 교수의 복직과 명예 회복은 그대들이 선결해야 할 절실한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김민수 교수의 활동이 상징하는 '예술가의 정신적 자유' 없이 '예술'의 존재 이유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소중한 자유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무시무시한 미술계의 권력체계를 해체하는 노력 없이는 그대들의 자유는 앞으로도 영원히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들의 선택만 남았다. 미대생들이여, 깨어나라!

딴지 교육/문화 논설우원 최가박당
mailto:hoggenug@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