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너뷰] 디자인을 이야기하다
-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 -
2002.10.5.토요일 딴지 문화부
김민수 전(前) 서울대 교수를 기억하시는가. 수많은
연구성과물을 가지고도 선배의 친일행적을 과감하게 폭로했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 재임용에 탈락한 그 양반
말이다.
- 참고기사
- 본지 39호 [주장] 미대생들이여,
깨어나라!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언론에서도 더 이상 이 사건의
경과를 다루지 않는다. 자.. 그럼 그 사이에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아직도 변한 것이 없다. 소송은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김민수 교수는
아직도 서울대 미대의 연구실을 비우지 않고 계속 출근하고 있고, 학교측에서는 그를 교수로 인정하지 않는다.
학점으로 인정되지 않는 강의를 매 학기 계속해 오고 있고, 일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그의
복직을 추진하고도 있다.
그는 최근에 대중을 상대로 한 디자인 책(김민수의 문화디자인/다우)을
출판하기도 했다. 책 출판을 껀수로 삼아, 지난 4년간의 이야기도 들어볼 겸 본지는 김민수를 찾았다. 디자인
전공이며 본지에서 시사만화 '더 쇼'를 그리는 양시호, 그리고 편집장이 출동했다.
이너뷰는 9월 26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불법점거(?) 중인
서울대의 김민수 교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 안녕하세요.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 최근에 출판된 책에 대한 소개가 다른 언론이나 라디오에서도 많이
나왔더라구요. 그런데 책에 관련된 내용만 있지 재임용 탈락 부분에 대한 얘기는 많이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의 경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선 좀 듣고 싶습니다.
98년도에 재임용에 탈락된 후 연구실을 지키고 무학점 강의를 계속 해가면서 당시만 해도 어디에 호소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행정소송을 같이 해갔는데 2000년 1월달에 1심 승소 판결을 받았어요. 당시에 항소하지 말고
복직시키라는 여론이 빗발쳤지만 학교가 무시하고 항소를 했죠.
그런데 2000년 8월의 2심에서는 1심이 뒤집어졌습니다. 1심에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고 했었는데, 고등법원에서는 이게 학교의 재량권이고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1심이
묵살된 거죠. 그때 재임용 심사과정에 있었던 엉터리 부실심사의 내용을 딴지일보에서 잘 자세하게 다뤄줬던 기억이
나네요.
음... 지금까지 법적으로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구요, 대법원에서 계류중입니다. 들리는 얘기로 대법원이
엄청 고심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이 문제가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고등교육 기관, 즉 대학 사회에서 교수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최근에 말도 안 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쟎아요? 예를 들어 세종대에서 이사장이 왜 이 조각품이
8등신이 아니냐는, 괴상하고 엽기적인 심미안을 가지고 부당하게 탈락을 시킨다든지...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를
짜르는 좋은 도구로 재임용제도가 쓰이고 있거든요. 실제로 나가야 할 교수가 나간 적은 별로 없고... (웃음)
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서 사립대학의 경우도 교수들의 권리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법원에서도 고심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 최근에는 언론에서 교수님 소식을 별로 볼 수가
없습니다.
뭐 언론이라는 게 구미에 맞는 이슈거리가 있을 때 사건을 다루쟎아요. 언론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예요.
언론에서 조명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아니고. 내가 하는 일을 계속 해 나가는게 더욱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죠.
결국은,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은 나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던 연구를 계속
해나가는 일이 결국은 4년여를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언론에서 찾아와 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말이죠.
김민수 교수 연구실 문짝에 붙어
있는 경고문들... 한눈에 분위기가 보인다.
- 그렇다면 디자인 계에서, 연구나 발표하는 데 외압이나 다른 불편함을
없으셨나요? 공식 타이틀이 없다는 부분에서.
그런 건 있죠. 전에는 김민수 교수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전' 서울대 교수 김민수'씨' 라고 얘기하니까
조금의 낯설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외려 자유인이라는 느낌도 있어요. 교수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나
일반인으로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도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일반인으로서 디자인 그리고 문화의
문제를 보려고 했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라는 것이 특수 전문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로써의 일반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중첩된 영역, 접점에서 나오는 활동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책에서는 디자인과 사회와의 소통의
문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 디자인이 결국은 사회와의 접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의 위치가
더 유리할 수 있다... ?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교수직으로 제가 발언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일반인으로서
디자인을 바라보는 것이 절실하게 독해해 나갈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선 재임용 탈락을 시켜준 서울
대학측에 감사하고 있습니다.(웃음)
서울대가 내 모교이기도 하지만, 모교의 사랑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온다, 한 개인을 담금질 시켜서 성찰의
계기를 주는.. (웃음)
아니 이건 우스개 소리만은 아니예요. 4년이 지나니까 나름대로 입신의 경지에 다다렀는지 결국 나와의
싸움이라는걸 느끼게 되었어요. 이 상황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치지 않고 끝까지 화두로 몰고 나가는
힘. 이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선배 교수님들하고의 관계는 어떠신지요. 4년쯤 지나고 나니까 옛날과
틀려진 건 없나요?
그 분들도 4년동안 나와 불편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습관을 기르신 것 같아요. 뭐 겉으로는 그냥 잘
지냅니다.
- 서로 양쪽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시는군요 (웃음)
서울대 미대에
붙어있던 포스터..
- 아까 보니까 이번에도 무학점 강좌 포스터가 붙여져 있던데... 이번
강좌가 9번째 무학점 강의라죠.
어떻게 하다 보니까 9층석탑을 쌓게 되었는데, 나 혼자 해서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죠. 비상대책위원회의
학생들이 노력을 많이 했어요. 빈 강의실을 찾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고... 학생들의 고생 때문에라도 제
문제가 빨리 해결됐으면 합니다.
- 서울대의 400명이 넘는 다른 교수님들이 동조를 했다고 들었고, 학생들의
동조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디자인과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지요?
4년이 지나다 보니까 이미 대학의 한 싸이클을 지나 버렸쟎아요? 과거에 문제제기를 했던 학생들은 졸업했거나
사라져 버렸고, 대학 내에서는 또 교수들의 무언의 교시라는 게 있쟎아요. 말로 하지는 않아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 알아서 기게 만드는..(웃음)
그런 부분을 학생들이 알고 있는 거겠죠. 그래서 그런지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미대하고는 상관이 없는
다른 과 학생들이 많습니다.
- 작년에 언론사 세무조사 문제가 나왔을 때 1인 시위도 하셨었고...
사회적인 참여를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민중미술 하는 분들은 그런 경우가 있지만 디자인계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분은 처음인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디자인계에서 보기 힘든 활동을 하는 계기는
무엇인가요?
결국 디자인은 사회적인 산물이고, 또 문화적 맥락속에서 소통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와 디자인이 별개라고
보지 않습니다. 디자인이라는게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을 때, 그 마음이라는 것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삶과
문화에 대한 성찰 없이는 나오기 불가능한 것이죠.
더군다나 디자인이라는게 해방후에 자성적인 성찰에서 나온게 아니라 일본식 기법, 식민미학의 껍데기 속에서
나온 것을 여기저기서 보쟎아요. 예컨대 경찰청 포돌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심볼들만 보더라도, 도대체 각 도시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그렇게 캐릭터들이 유치하고 아동스러운 캐릭터들만 일관되게 나타날 수 있는지... 눈알 크고
뒷다리 짧고.. 그게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쟎아요?
유럽만 보더라도, 고대의 신화에서부터 나오는 문장, 역사와 전통속에서 우러나오는 디자인을 써요. 그
디자인에서 자기의 정통성을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일본식 캐릭터, 엽기적인 그런 캐릭터가 남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기본적인 성찰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식 기법위주로 이어진 역사가 아직까지 계속 오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는 진로소주의 소주병 레이블을 보게되면 그 진로라는 타이포그래피가 어디서 온거 같아요? 그건 일본
스모경기장이나 우동집에서 볼 수 있는 그 글씨체라구요. 진로소주가 만들어진 1920년대 일제치하의 썼었던 그
폰트를 아직까지 쓰고 있다 말이죠.
- 그게 하나의 전통이 되어 버린 거구요.
그렇죠. 한국 고유의 막술인 소주의 글씨체가 일본식 글씨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게 지금의 한국 시각문화의
전통이 되어버리는 거죠. 이렇듯 아무 성찰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사실 일제 잔재라는 게 지나간 과거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래의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는 중요한 지점이라는 겁니다.
역사라는 과거의 일일 뿐 아니라 미래로 가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입니다. 양방향적인 거예요. 저는 과거의
친일문제 뿐 아니라 디지털 문화 속에서 변화되는 삶의 부분도 동시에 같이 보는 거거든요.
어쩌면 이런 작업은 힘들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우리나라는 유럽의 프랑스처럼 친 나찌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가 없었잖아요. 구렁이 담넘어가듯 일제 부역했던 그
인간들이 해방후에 사회적 기득권을 잡아 버리고, 그 다음에는 마치 영화 에일리언의 복제 시리즈처럼....
에일리언이 지금 4편까지 나왔는데, 1편에서 봤던 에일리언이 4편에서도 똑같이 계속 나오거든요.... 그런
것처럼 문화적으로는 식민의 알까기를 계속 보고 있는 거예요.
일제를 청산하자는 발언이, 디자인을 문화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는 저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개가 서로 별개의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교육적으로도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봐요.
- 아까 디자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때 말하는
'마음'이라는 거에 역사와 사회, 문화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사회적 발언을 하신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그 마음이라는 게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쟎아요? 우리는 자주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일제 36년간의 역사에 의해 그 5천년의 역사가 말살될 수 있다는 거는 아주 가공할 만한,
무서운 겁니다.
우리가 디자인 속에 담아야 할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전통속에서 자라나서 현대의 삶의 변화를 주시하는
첨예한 마음이 들어 있어야 하는 거고... 옛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의 문제, 성리학에서 얘기하는 4단
칠정의 문제, 인간의 본성, 감정의 문제, 어떻게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가의 문제, 이치를 깨닿는 마음들, 인간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일곱가지의 감정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디자인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 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디자인은 텅 빈 공간에서 사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문제라는 거죠.
우리가 뭔가 물건을 오래 쓰면 애착이 생기쟎아요. 내 것으로 오래 쓰면 정이 들기 마련인데, 그걸 보면
사물과도 우리가 소통하고 있다는 거거든요. 근데 그 소통하는 사물 속에 나와 같이 할 수 있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동반자적 가치가 없어져 버리게 되는 거죠.
- 그렇다면.. 결국은 그것은 디자이너가 노력해야하는
건가요?
문제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디자이너의 문제가 빠져있기 때문에 생긱는 문제입니다. 디자이너 역시
시민사회의 일원 아닌가요?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자기 몸뚱아리가 위치한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살필 줄 알아야죠.
디자인이 잘되려고 한다면, 제가 최근에 도달한 결론은, 결국 삶의 문제가 결부되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는
겁니다. 디자이너 끼리끼리의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거지... 실제의 삶의 문제와의 관계, 소통의 채널이 확보되지
않고 지네들끼리 히히덕거린다면 그건 딸딸이에 불과한 거지. 지금 상태가 그런거구요.
- 저희가 여쭤보는 거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은 주로 디자이너들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써 대오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 걸로 정리될 거 같은데... 디자이너들 말고 일반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딴지일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매체이고, 또 이번에 나온 책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해서
나온 책인데, 디자이너들이 대오각성 한다 치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일반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까?
건강한 소비의식이겠죠. 자기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정체성을 먼저 가져야 하는 거죠. 우리처럼 브랜드
위주의 소비가 아니라.... 누가 하더라라고 하면 무작정 따라가는 소비가 아니라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소비를 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로부터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았고 해본적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까 서양에서 일본에서 남들이 해 놓은 라이프스타일을 따라가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이번 월드컵의 교훈은, 공동체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나와 넘쳐 흐르는 힘이 거대한 에너지로 분출이 돼서
붉은악마라든가 하는 하나의 형식을 만들어낸 거죠. 여태까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서 대중에게
던져주고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라고 했다면, 이번 월드컵에서 나온 태극기 패션이라든지 이것은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가운데 형식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죠. 가장 바람직한 거는 내용에서부터 형식이 나오는 건데,
우리는 형식만 있으니까 이게 단팥없는 찐빵처럼 껍데기만 갖고 계속 해온거죠.
히딩크가 기술을 가르친 게 아니쟎아요. 기술은 문제가 없는데 체력과 창의성이 문제라고 했쟎아요. 디자인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사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루이 뷔통이라든가 그런 복제품 만들어 내는 거는 정말
잘하쟎아요. 특히나 요즘에 디지털적인 부분에서는 최고 수준이고... 기술은 문제가 없는데 내공과 철학이
문제입니다.
- 결국은 사회 전반적인 인문학적 소양의 문제가 되네요.
물론이죠. 일반 소비자들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어떤 스타일의 삶을 추구할 것인가, 남들 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은 무엇인가, 또
거기에 맞는 디자인을 요구할 줄도 아는 의식... 그런 게 있을 때 디자인도 다양해지게 되는 거죠.
-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게 안될까요. 우리는 브랜드 유행을 굉장히 빨리타고,
여자들이 화장도 굉장히 두껍게 하고...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나라가 남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고 정말
심하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그게 왜 그런 걸까요?
그거야 뭐 줏대가 없어서 그런거지. 습관 자체가 안되서 그런거고. 자기를 드러내는 방법이 없어서 그런거죠.
돈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 생기면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것은, 베블린이 얘기했듯이 과시적 소비입니다. 내가 돈
있다는 거 보여주는....
정말 생각있는 부자들은 그런 식의 소비를 보여주지 않는다구요. 과시적 빈곤을 내세울 수 있는 깡다구가
건강한 거죠. 돈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숨기고 비울 수 있는, 그것이 사회적 미덕이 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옷을 입는데 있어서도 값싼 거라도 자기의 분위기, 자기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소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장 아쉬운 건 한국 디자인계에 사상가 한 명이 없다는 건 정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아침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일반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화적인 소양을 쌓는 절대 시간이 많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한데... 문화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말은 좀 현실적으로 어려운 얘기 아닙니까?
그거는, 그동안 문화를 고급문화, 고급예술로 자꾸 보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되는 거예요. 패션만
해도 앙드레김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근데 앙드레김이 하는 건 패션이 아니거든. 무대에서 조명빨 받는 연예인을
위한 옷인건데, 그건 패션이 아니라 의상이예요. 어떤 특정한 상황을 위해서 연출된 옷을 의상이라고 해요. 그래서
무대 패션이라고 안 하고 무대 의상이라고 하쟎아요.
앙드레 김은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라 의상 디자이너예요. 앙드레김을 국민 패션 디자이너라고 한다면, 패션과
의상마저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의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디자인은 거리의 문화, 현실의 문화인데
그것과 특수한 사람이 입는 무대의상을 착각하는 겁니다. 디자인은 돈 많이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식주의의 허상이 항상 따라붙게 되는 거죠.
우리가 '문화'라고 할 때는 그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현실, 생활 속에 드러나는 삶의
총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다리를 예로 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리는 원래 만들어질 때부터 아름답게 디자인된 다리라는 겁니다.
역사와 기술과 문화와 예술을 종합해 놓은 한 도시의 명물들입니다.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나, 시드니 하버교,
프랑스의 뽕네프 다리....
우리나라 다리는 그렇지 않죠. 최근에 월드컵한다고 해서 조명등 붙이고 뭐 그렇게 했지만, 애초에 다리
자체를 아름답게 디자인 한 적이 없쟎아요? 자동차 타고 쌩쌩 달리는 기능적인 측면만 생각하지... 한강 다리에서
사랑을 나누는,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다리는 없쟎아요?
그러니까 기껏 하는 게 장식을 붙이는 그런 것밖에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국민학교때 환경미화 하듯이...
월드컵때 횃불 올린다고 하다가 헬기가 떨어졌는데 아무도 죽은 승무원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엽기적인
현실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가서 전봇대 뺑끼칠하는 것처럼, 미화차원에서 얘기한다 이겁니다.
디자인이 삶을 미화하는, 장식차원의 얘기가 아니라는게 바로 이런 겁니다.
- 그렇지만, 앙드레김 얘기를 잠깐만 하자면, 아방가르드가 전범이 되는
특성이 있지 않습니까. 패션쇼에서는 아주 극단적인 걸 추구하고... 가령 패션소에서 손바닥만한 가방이 대중적으로
퍼져나갈 때에는 조금 큰 형태가 되어서 유행한다든가..
아 그거는 앙드레김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옷이라는 거는 어쨌든지 신체를 벗어날 수가 없고 신체와 같이
가는 겁니다. 물론 패션쇼에서는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게 상품화될 때는 범용화 되어서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입지도 못하는 옷을 입고 나오는 걸 패션쇼의 전범으로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겁니다.
20만 학생이 동원된 서울 컬렉션을 하는데, 세계적으로 그런 컬렉션이 없다구. 새로운 패션 주기를 볼 수 있는
옷을 바이어들이 와서 판단하고 그러는 게 패션쇼지, 우리처럼 그런 거를 패션쇼라고 하지 않아요.
예외적으로 그런 게 있기는 하지만, 그런 거는 고급 브랜드들의 일종의 이미지 전략이고, 그 밑에는 탄탄한
피라미드 모양의 산업 구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꼭대기만 봐서는 안 되고, 그것을
소화하고 상품화해낼 수 있는 그 아래의 탄탄한 구조도 봐야 합니다. 근데 우리는 그 뿌리가 없단 말예요. 그
상태에서 그런 패션쇼만 하기 때문에 패션 디자인이 잘 안 되는 겁니다.
또하나는 얼마전에 대구 밀라노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는 문제가 있는데, 대구에 섬유공장 몇 개 있다고 해서
그게 패션의 중심이 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파리나 뉴욕이 패션의 중심지가 된 건 도시문화와 긴밀하게 연동되어
돌아가는 거지 거기에 공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억지로 막 만든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그
돈이 어디로 새고 있는지 몰라요.
얘기하다보니까 패션만 얘기했는데, 다른 분야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좀 전에 다리 얘기하면서 실용성만 고려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결국은 근대화 과정 전반에 대한 얘기가 되네요.
우리사회에서의 근대화라는 이슈가 삶을 바꾸는 혁신을 얘기했다면, 나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우리 문화를 보자는
겁니다. 5천년의 역사가 있고, 최근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다고 할 때, 그 둘을 어떻게 소통시키느냐가 우리가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 내용이라고 보거든요.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 박정희식 개발논리로 과거를 유실시키는 게 아니라 과거를 유지하면서 이걸 어떻게 현대적
맥락에 이식 시키는가 이런 문제가 정말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 언어의 문제도 크지 않습니까. 가령 프랑스 책을 보면 18세기 마을
연구를 하면서, 그 마을의 기록을 도서관 가서 찾아보고 뭐 그럴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단 해석이 안 되지
않습니까. 한자 따로 공부해야 되고 서체도 공부해야 되고...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문의 태도 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요. 고전과 과거의 문제를 오늘의 문제로
소통시켜주는 그런 노력이 없었고, 학문하는 사람들끼리의 문제만으로 머물러 있었어요. 사회와 학문이, 세종대왕
말씀대로, 서로 사맞지 아니했던 겁니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한글 자체가 훌륭한 디자인 컨셉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아주 의미있는 선언이었다구.
한자를 쓰지 말고 한글만 쓰자는 게 아니었어요. 당시로 치면 한자 문화권의 보편성 속에서, 지역적 특수성과의
소통을 하기 위한 발상이었단 말예요.
- 그런데 한국적이라는걸 강조하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오리엔털리즘에 빠질
우려도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렇죠. 그동안 한국적이다 라는 거를 우리가 굉장히 이국적인 한국성을 가지고 국제영화제에서 상도 받긴
했지만, 일상성이 다 빠져 버린, 박제화된 소재를 써서 그런거 아녜요? 미안한 말이지만, 일상성이 빠졌다는
점에선 하나의 오리엔털리즘이라는 거죠. 제가 말하는 건 그런 박제화된 소재주의가 아니라 동시대의 현실에서,
일상이 숨쉬는 그런 부분이 중요하단 거죠.
예컨대 JSA나 오아시스 같은 영화는 그런 부분이 잘 살아나 있죠. 그게 의미있는 부분이라는 겁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까지는 다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봅니다.
물론 임권택감독이 가지고 있는 한국의 구로사와로서의 역할이 있겠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와 모습과는
무관한 거죠. 영상미를 빼곤 어떤 일상적 모습을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국적 정서의 신기함 같은 거거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같은 영화도 같은 맥락이죠.
- 그거를 가지고 한국적인 거라고 우겨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디자인에서도 보면 문양중심적인 거를 가지고 한국적인 거라고 얘기한단 말예요. 마치 문신박듯이
옛날에 썼던 문양을 제품에 박아넣는 게 한국적인 게 아니죠. 심지어는 냉장고에 난초치는 것도 나왔던데 그런걸
가지고 한국적인 거라고 우기면 안되는 거죠. 넥타이에 무슨 문양을 넣었다고 해서 그게 한국적인 게
아니라는 겁니다.
- 전에 김치냉장고가 문화를 반영한 잘 된 디자인이라고 하셨는데...
맞아요. 그런 김장독 냉장고가 비로소 한국 식생활 문화를 디자인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거죠. 김장독
냉장고에서 김치냉장고가 나왔고. 그게 올바른 방향인 거죠.
삼성의 휴대폰 같은 경우에도 모토로라나 노키아보다 유럽에서 20%이상 비싸게 받는걸보고 감동 받았는데,
원인이 뭐냐 말이지. 우리나라에서의 휴대폰 문화, 즉 내수시장에 대한 성공이 결국은 세계에 경쟁력이 있다는
겁니다. 국내에서 검증이 되는 것, 이게 하나의 전범이 되어서 이것이 글로벌 브랜드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너뷰 진행중... 뒷모습은
'쇼'
- 요즘은 '그래픽 디자인'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으로 말이 바뀐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실제로 그래픽디자이너들이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라고 명함도 많이 파고 다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실제로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거야 뭐 결국 용어만 바뀌고 있는 거죠.
- 예컨대 디자이너만큼 사회에 관심없는 집단도 없는 편이잖아요. 그런데
커뮤니케이터라고...
뭐 말이 멋지니까 쓰는거지... 최근 문화컨텐츠라는 말 많이 하잖아요. 컨텐츠라는 말 뜻 자체가 '내용'
아녜요.
디지털 컨텐츠라는 것은 그 형식이 디지털이라는 거지, 결국 그 내용과 본질은 문학이라든가 음악이라든가,
기존에 우리가 해 왔던 것들 아녜요. 근데 이게 마치 뭔가 새로운 것인양, '컨텐츠'라는 이름으로 내세우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야. 사실 웃기는 말 아녜요? 문화 컨텐츠를 만든다... 얼마나 문화가 내용이
없으면...
- 내용을 만든다...(웃음)
내용을 만든다는 얘긴데, 그게 가능한 얘기겠냐구요. 아마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할걸요. 만들겠다고 해서
그게 만들어지는 겁니까?
- 결론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세계관이나 철학,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고 이것이 문화적으로 사회와 잘 연동될 때 올바른 디자인이 된다고..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죠. 중요한 건 디자인이라는 게 단순한 잔재주가 아니라 철학하는 사고행위이면서 사회와의 문화와의 접점을
찾는 행위라는 거죠. 지금 당장은 제 책이 불온서적처럼 느껴질 거예요. 교육 시스템 자체가 그렇지 않으니까.
- 예술과 디자인이 다른점은 어떤건가요.
예술은 상위개념이고 디자인은 예술의 하위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되지요. 예술이라는 상위개념이 있고, 공연예술,
음악, 조각, 미술, 건축등 예술이라는 범주속에서 하위 개념으로서 사회적인 예술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종의 소셜아트라고 얘기하면 되겠죠. 디자인이 예술이냐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은 거리의 예술로서
예술인 거죠. 만화가 최근 제 9의 예술로 예술에 편입된것처럼, 디자인은 거리에서 사람들과 생동감넘치는 일상
삶과의 스토리 텔링을 하는 예술이라는 거죠.
흔히들 미술은 미술가 개인의 예술적 행위이고 디자인은 그 대중적인 소비양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방식은
이미 70년대에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이 나오면서 깨졌어요. 미술도 대량복제가 가능해졌고... 생산방식이 아니라,
그게 어떤 맥락에 있느냐에 따라 미술과 디자인이 갈라진다는 거죠. 단지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벽걸이 TV가 과거의 명화를 대치해 간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과거에 명화가 있던 자리를
벽걸이 TV가 대체할 수 있죠. 미술이냐 디자인이냐의 경계선 자체가 급변하는 기술 속에서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디자이너가 갖추어야 할 감각은 더 풍부하고 많아야 한다는 겁니다. 과거처럼 꽉 막혀져 있는
사람은, 뭐 그냥 그렇게 살다 죽어야지.... (웃음)
-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지금 밝히기엔 뭐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이나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것들, 그런 것들을 알리고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작업, 그런 것들을 하려고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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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딴지일보 독자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요. 책 사달라는
말이라도...(웃음)
제 책 사달라는 말 보다도, 제발 좀 우리 문화의 몰상식이, 이번 책으로 인해서 딴지일보 독자들만과라도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천박함을 느끼는 거는 나에게는 굉장히 사막과 같은 풍경이예요.
사막과 같은 문화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우리 자신이라는 거. 각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 이거를 좀 관심을 갖고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로써 인터뷰는 끝이 났다. 몇 마디 안한 것 같은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렇다. 결국 디자인도 삶의 문제인 것이다. 삶을 은폐하는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성찰하고 독백하며 나아가 문화를 생산하는 디자인을 그는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얘길 들으면서 문득 군대 생각이 났다. 겉의 번지르함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실을 구석탱이에 짱박아 왔던가. 우리의 디자인이, 우리의 문화가 딱 그 모냥 그 꼴이
아닌가말이다. 세상과 호흡하지 못하는 디자인은 그것이 아무리 멋지고 이뻐 보이더라도 좋은 디자인일 수 없다.
삶이 철학이 들어있는 디자인.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들의 건강한 안목,
이것이 우리나라 디자인을 더욱 살지게 할 것이다. 그러니 한강다리를 환하게 밝힌 조명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자여,
부산 광안대교의 위용에 감동의 몸서리를 치는 자여. 보기좋은 떡이 굿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사람들이여. 이제 우리
'왜'라는 화두로 다시금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영화를 얘기하듯 우리의 디자인을 이야기하자. 삶의 맥락에서,
문화의 차원에서 디자인을 바라보자.
딴지문화부 쇼 (show5@chollian.net) 편집장(asever@ddanzi.com)
딴지일보는 가는으뜸체로 최적화
되어있슴다.
가는으뜸체가 시스템에 깔려있지 않으신 분은 다운(246KB)
받아 설치하시어 훨 미려한 딴지 본연의 모습을 만끽하시기 바람다.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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