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학년도 입학시험의 수학 II의 채점과정에서 김 명호 조교수가 문제에 잘못이 있다고 하며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학교에서 수학II 의 채점을 담당하는 수학과, 수학교육과 교수들이 연석회의를 하여 문제를 검토, 분석 논의한
결과, 문제에는 잘못이 없었으며(참조: 수학과 교수, 김미경의 자백),
1 차 채점을 통하여 모든 수험생에게 불이익이 없는 채점 기준을 명확히 정하여
교무처장에게 제출하였고 어떤 경우에도 이 기준으로 채점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참조: 법원에 제출된 189명 수학교수들의
의견서와
미국수학회 회장 서한)
이러한 채점결과 시험을 본
몇 천명의 학생들 중 단 한명도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 결정을 독단적으로 부인하며 총장 님께 잘못된 문제를 은폐 시키려 한다고 하며 서면으로
항의하는 등 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한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채점위원장의 지시를 따르지도 않는 등 또 채점도
중간 점수를 주지않고 극단적으로 거의 최저 점 혹은 최고점으로 채점하며 개인적인 기준을 적용하여 전체 타 채점위원에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더욱이 외부, 즉, 서울대 수학과의 이모(주: 이 현구) 교수에게 전화하여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등 학교의 문제를 그 것도 잘못이 없는 문제를 큰 잘못이 있는 것처럼
(참조: 성대가 잘못을 인정했다고 보도한
한국일보) 외부에 유포한 사항은 학교를 곤경에 처하게 하려는 의도이고 해교행위 라 생각되며 학교 당국도 이에 단호히 대처한 바 있습니다.
우리들의 하나 같은 걱정은 자기가 속하는 학교의 문제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극히 비정상적인 염려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증빙자료:
(1) 장을병 전 총장께 보낸
출제 오류보고
(2) 수학II 채점 과정에 참여한 박평우 출제위원장 및 수학과, 수학교육과 교수 일동
넌 누구 밑에 있을 인간이 아냐 - 이현구 성대 우습게 보지 마라 - 심윤종, 전 성대총장
대한민국 교수들은 바지에 똥 싸서 깔고 뭉개는 인간들 - 박삼봉
본인(나, 김명호)은, 대학시절 윗사람들의 똥폼 위선, 쓰레기 관행/관습 대물림을 혐오했다. 아래 기록은 그런 폐혜 근절의 오랜 다짐을 실천하겠다는 각오로, 1991.3월 조교수로 부임 후 1996.2월 쫓겨나기까지 벌어진 핵심 사건들이다
학생과 교수들에 대한 본인의 생생한 경험이다 - 2023.5.17
학생들에게는 '암기가 아니 이해', '언행일치' 교육을 추진하며 고충을 알고자 축구 동아리 '시그마'에 가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과교수들과는 학과 발전을 위한 자세로 대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원칙으로. * 자주 언급되는 정봉화는 성대 수학과 출신, 통계학 석사. 수원 이공대 캠퍼스의 '실세 4인방의 두목'으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성대 취업 전에 서울대 이현구 교수와 함께 만났었다. 그리고 입시부정사건 당시 대한수학회 이사
(1) 채점 첫날 1월 16일
수학 II 7번 채점위원으로
배정된 김명호(수학과), 김중규(전자공학과), 서수정(금속공학과), 이동복(재료공학과) 4명의 교수는 출제위원(이우영, 채영도 수학과 교수)들이 나누어준 모범답안과 채점기준에 의해 채점하고 있었다.
약 삼분의 일 가량을 끝냈을 즈음,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문제풀이가 교묘한 테크닉을 사용했어야 했기도 했지만, 그 많은 학생들 중 모범답안과 비슷하게
풀어낸 학생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수험생의 자세로 문제를 풀어보기로 하고
시작한지 불과 2-3분만에 문제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입시 문제라는 큰 문제에 나 자신도 놀래서, 이동복, 서수정, 김중규 교수들에게
설명, 확인하고 출제교수들에게 알렸다. 채점은 중단되었고 퇴근.
* 채점동료 교수들에게 틀린 거 설명하는데, 상당히 애 먹었고 고작 한다는 소리들이 확신없는 '거 이상하네'...
다들 이과 출신인데 말이다. 논리적 기본 능력 자체가 형편없는 이런 돌머리들이 뭘 배워 뭘 가르친다는 건지...
(2) 채점 2일째인 다음 날
① 채점장소로 가니, 이우영, 채영도 교수가 한쪽 구석으로 불러 놓고 모범답안을 이렇게 수정하면 어떻겠냐며 내놓는다
한마디로, 모범답안이 없는 문제에 대한
'사기채점기준'을 내놓은 것(이하 '사기채점기준').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없었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사기를 칠 수 있는가하고.
단언컨대, 수학 II 7번 문제를 보고 이 세상에 그런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참조: 1. 이상하 교수의 ☞ 성대 교수들의 3가지 오용, 미국 SAT 수학문제 오류 사건, 나쁜 약 vs 나쁜 수학문제 2. 실제로 문제오류에 도달했던 수험생들이 있었으나 답안 작성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입시문제가 틀렸으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류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풀이가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고 포기하였으리라.
② 두어 차례의 자체 수학과 교수회의에서
나: "이 문제는 틀렸으니 문제를 폐기해야 하니, 동점처리를 해야 한다."
이우영(흥분한 큰소리로):"문제가 틀린게 아니다, 잘못된 거지*"
나머지 교수들: "사기채점기준으로 다시 채점하도록 하자.
전부 만점이나 동점으로 처리하면, 혹시라도 있을 교육부 감사에서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금방 이의 제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출제오류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부분점수를 주게 되면 출제오류를 모르니까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 이우영이 하도 강하게 얘기해서 국문학과 강신항 교수에게 틀린 것과 잘못된 것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더니, '틀린것이 좀 더 강한 표현이다'
③ 의견 일치를 볼수 없어 채점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고, 교무처장(고상룡 법대교수), 출제위원장(수학교육과 교수)등
수학교육과 교수들도 출제오류를 알게 되었다. 진전없이 시간만 지나고, 그날 저녁 서울대 수학과 이현구 교수에게
(문제를 알리지는 않고) 출제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조언을 구하였다.
(* 이현구교수가 '수학과 및 수학교육과 교수 일동의 증언'에 나오는 이모 교수)
이현구: "학교의 책임자가, 예를 들어 교무처장 정도가, 배석한 회의를 열어 결정을 하면, 김선생은 그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나:"그렇게 하겠다."
(3) 채점 3일 째(마지막 날, 채점 재검하는 날)
상황은 전날과 변함이 없었다. 나를 제외한 채점에 관여한 전 수학과 교수들(이우영, 채영도, 정봉화, 김용태, 김미경, 이상구) 여전히 이제까지 한 것 다 무시하고 '사기채점기준'으로 전부 새로 하자는 것이었다. 교무처장 주도하에 회의 소집을 하자고 했더니,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직접 교무처장(고상룡)에게 회의 주도하라고 했더니, "나는 모르니, 수학과에서 알아서 해라."(* 양아치 조폭과 다름게 없음)
저녁때(또는 늦은 오후), 참석하라고 한 회의에 가보니, 채점에 참가한 전 수학과 교수들과 수학교육과 교수들이 전부 와 있었다.
끝내 교무처장은 없었고. 돌아가면서 얘기를 시작했는데,
김미경: "다수의 의견이 '사기채점기준'으로 채점하자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정봉화: "학과 동료가 실수 했으면, 그것을 감싸고 덮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사기채점기준'으로 채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등등 녹음기 틀어 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더 이상 앉아 있기 거북해서 아무 말없이 회의실을 나왔고 그 이후로
나는 채점에 관여하지 않았다. (* 4월 달에 김미경교수에게 들은 바로는, 수학과 교수들이 '사기채점기준'으로 전부 새로
채점했단다, 후하게 점수 주는 방향으로.)
며칠 후, 1월 말 임기인 장을병 총장을 이을 총장선거에서, 정봉화 교수가 밀었던 성대출신 정범진 교수 선출
1월 20일 장을병 총장실에
출제오류 보고서 제출하였고(* 총장은 지방 출장중이라 만나지 못함),
1월 26일 수학과 전교수들의 징계요구서가 제출되었다(* 장을병이 '이게 무슨 징계사유가 되냐'며 서랍에 처박아 놓은 걸 정범진이 밀어붙인 것)
1월 27일, 출제위원인 이우영, 채영도 교수가 본인의 부교수 승진 심사위원으로(본교 2, 외부 1) 선정되었고 심사보고서를 의도적으로 제출하지 않으므로써,
부교수 승진 탈락시켰다.(* 외부심사위원 이현구 교수는 합격)
성대 수학과 교수들의, 축출 1년 계획
1. 목표: 96년도 재임용 탈락으로 해고
2. 그를 위한 필수 단계: 95년 4월 10월의 부교수 승진 2차례 탈락. 이유는 부교수 승진되면 임용기간이 10년으로 늘어남으로 인하여 96년 2월의 조교수 재임용 자체가 자동적으로 소멸되는 고로, 부교수 승진탈락은 필수.
3. 재임용 탈락 사유 조작과 중징계:
4학년 학기말 백지답안 제출 등 학생선동으로 교육자적 자질이 부족하다고 선전하며
정직 3개월의(12월 12일) 경징계(?)를 하였고
마침내는 계획된 대로 96년 2월에 재임용 탈락.
* 성대 입시부정 공범들: 정범진 총장, 심윤종 교무처장, 전 수학과 및 수학교육과 교수들, 정보공학과 원동호, 고분자 공학과 김태호, 전몽각 부총장 등
교무처장 심윤종
3월 6일 부교수 승진 탈락에 대하여 총장 면담을 신청했더니, 심윤종 교무처장이 먼저 보잔다.
심:"무슨 일이냐?"
나: "부교수 승진 탈락 사유를 알고 싶은데, 알려주지 않아 재심청구 겸 총장에게 청원하러 왔다. 학교에서 탈락사유를 알려주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을 수 밖에 없다."
심:"성대 우습게 보지 마라"(* 성대출신 이혁우,
강영호 판사, 박홍우의 성대를 위한 재판조작)
나:(양아치 새끼랑 얘기하나 싶어, 멍~)
① 맡은 과목 중 하나가 70명 안팎의 미적분학, 고분자공학과와 A, B로 나눈 화공과 학생 절반 수업 첫날, 매주 퀴즈와 중간/학기말 시험 날짜 공표. '퀴즈는 3문제 정도, 암기력 아닌 이해 테스트로 3-4줄 이상 넘어가는 그런 답은 없고 open book open note'라고
퀴즈답안은 채점하여 바로 그 다음 시간에 나눠주고 이의신청하라고 함.
처음에는 학생들이 힘들어 했지만, 차차 적응되어 갔다. 학기말 시험 날짜가 다가왔는데... 뜻하지 않은 일 발생. 성대 문과 김귀정 여학생이 시위 도중 질식사하는 사고가 발생, 그 장례식 날짜가 학기말 시험날짜와 겹치게 된 것이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성인지, 대중 심리인지 학생들이 장례식에 참가해야 한다며 학기말 날짜를 연기해달라는 것.
당연히 거절. 줄기찬 학생들의 요구, 당시 자연대 학생회장(화공과 3년)의 청원에 융통성을 발휘하여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 장례식에 참석한 학생들에 한하여 학기말 재시험 기회를 줄 것이고,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학기 초에 정한 날짜에 보도록. 학생회장과 학생들도 찬성하고, 학생회장이 책임지고 출석을 점검 보고하기로 약속했다.
시험날 총 학생 70명 중 6-10명 정도가 시험 본것 같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가 학생 A가 찾아와, 자신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재시험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건, 학생회장이 방문 밑으로 밀어넣은 출석 명단에 솔직하게(?) 참석하지 않았다는 학생 A도 출석으로 되었던 것... 떼 짓는 근성.
② 2학기 미적분 첫수업 들어가니
전학기와 달리 20명 정도 밖에 없었어. 나야 상관없는데, 문제는 딴 곳에서 터진 거야
교무과에서는 강의실과 학생 수 분배를 위하여 학생들이 신청해야 하는 과목들에 대한 대강의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었고 내 강의실에 70명 정도가 등록되도록 해놨었는데...
학생놈들이 1학기 때의 내 소문을 듣고는 미적분의 다른 강의를 신청한 거야 그게 밀리고 밀려 다른 과목의 강의실에 최대인원수를 훨씬 초과하는 사태가 발생했어, 뭐 200명이 들어왔다나?
그 강의 담당 교수가 깜짝 놀라 교무과에 연락, 교무과에서 학생들을 원위치 시켰지.
(2) 1995년, 졸업 예정 4학년들의 전공필수 학기말 집단 백지답안 제출 - 전형적인 개돼지 몰이
가. 배경은
① 살벌한 똘마니 충원회의 충돌 후, 채영도가 본인 방에 찾아와 물리학과 오필렬 교수 입회하에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김선생을 학과장으로 추천하겠다'며 학과장 추천서를 남겼는데, 입시출제 오류(이우영, 채영도 출제위원)가 터진 후, 채영도가 김용태와 함께 정봉화 패거리에 합류하여 본인 축출 계획에(부교수 승진 탈락, 징계요청, 야간교육대학원으로 이적 강요 등) 골몰하고 있었고,
② 본인은 부임하면서의 교육 계획을 예정대로 실천하고 있었지. 그 중 하나가 4학년이라도 자동졸업시키지 않는다거.
부임하며 맡게된 4학년 전공필수 위상수학 학생들에게 누누히 얘기했지. '4학년 학점 자동보장되어서는 안된다. 점차 강화할 것이니 후배들에게도 알리라'... 실력 없고 성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 경우 F학점을 주기로한 시기가 95년.
그렇게 4년간을 경고했는데도, 학생 한놈이 취업했다고 학기 내내 얼굴 한번 비추지 않다가 학기말 시험 며칠 앞두고 졸업시켜달라고 찾아왔어. 당연히 거절했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노력없이 학점이나 거저 받으려는 다른 학생년놈들이 똘똘 뭉쳐 지들끼리 몇 차례 회의하고 지랄했다더군. 성실한 애들이 반대하는 와중에,
나. 본인을 제끼고 학과장에 앉은 정봉화가 '기회는 이때다'하고 개돼지 몰이에 나서 대학본부의 지원을 업고
① 성대 역사상 처음으로 (본인 담당) 4학년 전공필수 위상수학의 여름학기 개설 및 수업료 전액 면제를 약속함으로써
② 학기말 시험에서의 집단 백지답안 제출과 더 나아가 본인이 주는 학점을 거부토록 선동한 거야
그 결과 51 명의 졸업 예정자 중 31 명이 백지 제출(* 2명만 재시에 응함 =>
29명의 백지 답안지).
여름 학기 들은 학생들은 최소한 B이상 받았다더군. 뭐~ 교칙이고 뭐고 다 개묵살한 거지
다. 그 뒤 95년 2학기 = 마지막
수원 이공대에서 담당했던 모든 과목들 박탈당하고 서울 명륜동 인문대에서 1학년 미적분 강의.
'처음 들어보는 심도 있는 강의', '학생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 기억에 남는 익명 학생들 평
* 김민수에 대하여
2005년 귀국해서 연구실에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첫마디가 '난 누구한테도 도와달라고 한 적없다'
1. 6년간 무학점 강의 이어온 정신력만큼은 인정한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에 춤춘 언론은 그렇다쳐도
2. 연구실 쫓겨나지 않고 강의 지속할 수 있었던 건 학생들 도움없이는 불가능. 헌데,
3. 복직 후, 복직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학생(금기원)이 졸업할 때 다른 교수들이 보복 트집 잡았는데, 김민수가 '좀 두고 보자'했단다. 그리고 1-2학기 늦춰졌고. 똥 누기 전과 후가 다르다더니.
3. '교수 채용'= 똘마니 확보
재직시 3명의(이상구, 김미경, 배종식) 채용이 있었다.
(1) 1991년, 이상구
대수학 전공 충원 정보를 어디선가 얻은 이현구 교수가 정봉화에게 좋은 사람 있다고 했더니, 정봉화가 '우리 사람 있다'며 신경질 냈다는 얘기를 취업 알아보는 학우로부터 들었다. 그때야 채용 계획을 알게되고...
후보자들 제출서류들 중에는 보통 3통의 추천서가 포함되어 있다. 내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추천서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적으로 '개판' 2개 중 하나가 이상구 지도교수의 '추천서'... 이상구가 잘한다는 건지 못한다는 건지 두리뭉실 주절주절 그냥 끝났다. 추천서라고 부를 수 없는 아주 형편없는 '개판 추천서'
물론 후보자들 중 최악이었지만, 성대수학과 출신의 첫번째 외국 박사학위자라는(Utah state) 타이틀만으로 임용 확정(* 채용 후 1학기 강의도 끝나기 전에 후배 학생들로부터 '맹구'라는 별명 얻음)
터무니 없는 일이었지만 1년도 안된 신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형식적인 채용 교수회의 전날 잔뜩 술 처먹고 덜 깬 상태에서 참석하여 술 냄새 풍기는 일 밖에 없었음.
(2) 1992-3년 김미경, 은퇴하는 이헌재의 후임으로 등장한 성대수학과 출신
92년: 채영도는 서강대 출신. 타대학 출신으로 비슷한 나이대로서, 성대실세 정봉화에게 갈굼당한 것 등 서로 주고 받으며 본인도 나름 위안을 얻었는데... 웬일로 찌질한 채영도가 회의에서
'정봉화, 니가 예전에 여자라서 안된다고 반대한적이 있는데 왜? 이제와서 여자를 뽑으라고 하냐?'고 그랬더니
정봉화가 '금년에는 충원하지 말자'라고 함. * 본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 술 냄새도 풍기지 않았고.
93년: 보류된 92년 충원 계속
김미경이 본인 집 근처에서 전화하며 집으로 오겠다고 하여 어쩔수 없이 나가서 만났어.
김미경: '내 꿈은 성대에서 후배들 가르치는 거다. 그러니 도와달라고 찾아왔다'
본인: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가능하면 본교 출신 채용하지 않는 게 미대학의 기본 원칙이라는 거 모르냐?'
김미경: '할 말 없다'(* 맹구보단 헐 나은 거지)
그리고 교수회의에서 (기억도 안 나는) 몇마디 얘기하고 채영도도 반대의사 얘기하고 끝나 연구실로 가는데, 아~ 글쎄 졸졸 따라오면서 채영도 그 시발놈 한 소리가 뭐 였는지 알아?
'김선생님, 나 찬성하게 해주세요'야. 뭔 얘길 할 수 있겠어? '알아서 하라'라고 하고
나는 본부에 올리는 찬성여부 서류 맨 첫칸에 '반대'라고 쓰고 그 위에 도장 찍었지.
그 전까지는 교수채용여부는 만장일치이어야 했는데, 묵살되고 김미경이 임용됐어.
(3) 1994, 배종식, 드러난 '교수질' 인간들의 양아치 조폭성
1994년 겨울, 당시 통계학 가르치던 김영돈 교수 은퇴로 생긴 충원.
교수라는 이 개만도 못한 인간새끼들은 학생, 학과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고 그저 자신의 세력 넓힐 궁리만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 사건
① 첫 채용 교수회의
같은 통계학 가르치는 정봉화가(김영돈으로부터 석사학위 받음) 통계학 전공을 뽑자고 한다.
그에 대하여 나는 수학 전공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며 반대했다.
정봉화 왈, '통계학 교수가 은퇴해서 통계학을 뽑자는 건데 왜 반대냐?'며 학생과 학과 발전 내팽개치고 오직 자신의 '통계학 따까리' 충원하겠다는 욕심하나만으로 개소리를 지껄였다. 그 개소리에
가. 수학과 통계학 구분이 없었던 예전과 달리, 성균관대학교 내에 통계학과가 따로 있고
나. 우리과는 수학과지, 통계학과가 아니다
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졸업생들 취업과 학과의 미래를 위하여 (그 당시 유행하는) numerical analysis 전공자를 뽑아야 한다
라. 따라서, 통계학은 수학과에 필요없다, 즉 쓰레기와 다름없다. 선생님은 쓰레기 안 버리냐?
정봉화가 끽소리 못했다. 나중에 김용태, 채영도가 시원하게 잘했다고 했다. 그러더니, 채영도가 '김용태가 자기 전공 쪽으로 뽑자고 하는데, 어떠냐?'고 묻는다. 단칼에 거절.
② 조폭성 드러낸 살벌한 2차 회의
회의 시작하자 마자, 정봉화의 충복, 이우영이 '김선생, 얘기 좀 합시다. 이런 이런 소리를 했다는데.....'며, 생뚱맞은 얘기로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교수 충원에 대한 얘기는 일절없이 말이다. 다른 교수놈들은 형식상 말리는 척....하도 어이없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내 앞에 서서 '내가 집에 있는 칼을 오피스에 갖다 놨는데, 가지고 올테니 그 칼로 내 배 찔러!'라고 난리법석을 쳤다, 바로 옆 조교 사무실에 다 들릴 정도로. 임조교가 박한일 조교에게 '야, 이거 살벌해서 듣겠냐?'고 했단다(* 법대 양아치들의 주먹질)
(1) 수학과 축구 동아리, sigma
워낙 축구를 좋아하여 고등학교때 구박 받아가면서 열심히 했고 유학 시절에는 축구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1.
동아리 얘기 듣고 대학원생 통해 의사 타진하고 합류했다. 미국과 한국에서의 교수 학생 만남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돈, 미국은 각자인 반면 한국은 거의 무조건 교수가 내잖아2. 그걸 분명히 했지. 회비는 2배로 내지만, 뒷풀이에서 기대하지 말라고. 차차 익숙해지며 서로 아주 편해졌어. 학생들이 저녁 때 술 마시자고 찾아오고 그럼 서로 주머니 털어서 술과 안주 사서 가게 앞이나 잔디밭에 앉아 술마시는 거야.
재밌었지, 특히 뒷풀이3.
열외없이 동아리 대표가(복학생) 하라는 대로 다 하고. 근데 구보할 때 '사나이가 태어나서..'를 부르더라고. 불간섭 원칙이었지만 쓰레기 관행은 두고 볼 수 없어, 대표에게 '군대가 그렇게 좋으냐? 안 좋다며 왜? 부르냐?' 군가는 없어졌어.
1. 오하이오 주립대 시절, 매주 금요일 오후 수학과 (한상근, 김정진, 김재문, 김명환, 송용진 등)과 다른과 애들에게 전화 연락하는 부지런 떨어 3-5명씩 편 나눠 해왔었어. '마지 못해 못 이기는 척'하며 나오는 태도가 영~ 맘에 들지 않았는데...
한번은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오는 거야, 못할까봐 걱정되어 전화 독촉해서 3명씩 나눠 하고 있었는데,
김정진이 우산 쓰고 나타나서는 '혹시나 하고 와 봤는데, 하네?'라고 되먹지 않은 소릴 하길래,
'야, 분데스리가가 이 정도 비에 경기 취소하는 거 봤어?'
그 이후로는 억수같이 비가 오지 않는 한, 무조건 금요일 오후에 모이고 점점 불어 나중에는 20명 이상 북적북적.
2. 그러니 교수들끼리 학교 근처 식당갈 때 학생들 없는 곳으로 찾아다니고... 웃기는 건 석박사 과정 중의 비용은 학생에게 부담시키더라. 발표에 참석한 교수들 식사비를 학생이 지불한다든가 등. 그걸 듣고 놀랬지. 서울대 수학과에서는 지도교수가 부담하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그 자리의 최고령 교수가 내거든. 그런 전통(?)에 따라, 석사논문 발표장에서 학생이 음료수 들고 왔길래,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거 준비하냐'며 금지시켰어.
모든 월급 보너스가 집사람 통장으로 들어가고, 점심 도시락에 1주일에 1만원 타 쓰고 있었고. 비상금은 뜻밖의 수입, 입시채점수당과 (이우영이 독촉하여 교내잡지에 낸) 논문마다 30만원인가? 주더라고. 놀래서 이우영에게 '웬 돈을 주냐'고 했더니, '적어서 올려달라고 할 판인데..' 하더군.
3. 술집 또는 잔디밭에 여럿이 앉아 술마시고 노래하고. 잘 놀더만.
첫잔은 받고 그 다음은 '각자 알아서 마셔라, 남의 잔 빈거 신경쓰며 마실 필요있냐?' 절대 강요하지 않았지. 헌데, 정봉화는 대접에 막걸리 따라 모두에게 돌리더라고.
나는 안 피지만 담배는 피우라고 했어. 그랬더니 어떤 학생놈은 정봉화 있는데서도 피우더라고.
여하튼, 학생 하숙집에서 2번 자기도 하며 이상구는 '맹구', 내 별명, 고속터미널 근처 식당 아르바이트 얘기 등... 애들이 학생시절을 나보다 힘들게 보낸다는 걸 알게 되었지.
(2) 삶의 자세
① 늘학생... 배우고 익히는 걸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책상 앞이 아닌 그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이 가르치는 게 뭘 하겠다는 건지도 모르는 교수들에게 실망하고 별 다를 거 없었던 유학시절에 많은 방황했지만, 늘 뭔가 부족함을 느꼈거든. 이제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적어도 뭘 해야 하는 지, 내 길을 찾은 거 같거든.
아이러니컬한 건 성대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거야.
* 정확히 말하자면, 쓸만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귀에 꽂히길래 실생활에 요긴하게 써온 것뿐이야. 예를 들면, '마이티'하면서 김현광, '아끼다 똥 된다'; 중국집 술자리에서 박유호, '입안을 물로 헹구는 습관이 양치질처럼 번거롭지 않고 이 건강에 좋다'; 채영도 '친구란 나쁜 짓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정봉화, '성대애들은 소속감이 없으면 불안해 한다'; 김정진, '국화와 칼'의 '사무라이와 사투 앞둔 평민'의 자세 등 그리고
박삼봉(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가. 바지에 똥 싸서 깔고 뭉개는 게 이 땅의 교수라는 것들
나. 출제오류 보고서 보고는 '이긴다. 모든 걸 다 까발려야 하는데, 언론의 집중조명 감당할 자신있냐?' 단언하더니 몇십 분 후 '승률 50%' 다. 법리에 눈 뜨게 된 조언
이혁우 시발놈이 재판을 열지 않기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판사맘에 달렸다는 헛소리만 듣고 전화, '기일지정 신청서 내보지 그래?'한다. '법전 보니 해당사항 없는 거 같은데, 내도 되냐?'했더니 무응답 ... '!'
② 언행일치 - 터진 주둥이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박홍우 등 판검사년놈들 증오할 수 밖에
어릴 때, 읽은 삼국지, 군협지 등에서 자주 인용된 '남아 일언 중천금' 영향
실천하기 어렵지만 항상 염두에 있으니, 가능하면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하지만 시작하면 마무리 지어온 대로 교수 학생간의 신의를 대부분 다 지켰지, 시간 엄수1, 교수의무 충실2, 권한오용 엄금3, 공사구별4 등등 ...
이우영 양아치와 정봉화 그 쌍것이 학생들 개돼지 몰이로 깽판치기 전까지는.
1. 수업 5분전에 도착
대학시절 교수년놈들 수업시간 몇분 늦게 들어오는 게 학생에 대한 무슨 권위라고 아는지, 시발것들이지
2. 질문을 적극 북돋고 답하기
이우영의 석사과정 학생이(황인성), 내 담당도 아닌 해석학 문제를 들고 왔어.
'해석학 지도교수인 이우영에게 물어보지, 왜 나한테 왔냐?'
학생 왈, '이우영한테 가면 2주일 동안 깊이 생각해라'고 한다는 거야. 2주일 지나 가도 또 같은 말 반복하고
여하튼 그 자리에서 해결해줬는데, 어이가 없더군. 이우영 자기도 모르니까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사기친거지.
나의 경우, 질문에 대하여 단 한번을 제외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해결해 주었다.
그 한번은 저녁 늦게 찾아온 전대열의 질문에 대해 금방 떠오르지 않아 몇십 분후 도서관 찾아가 가르쳐 준 거.
3. 사사로운 감정과 출석으로 학생에게 학점 등 불이익 주지 않기
정봉화: 미적분 강의의 87학번이 쉬하면서, '봉화형은 우리가 고등학교때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거로 취급하는데, 왜 그래?'했는데, 뭔가 뒤통수가 뜨끈뜨끈, 돌아보니 정봉화가 변기실에서 나오더라는 거야. 그 후 내리 2-3학기 F 맞았다는군
박세희: 지가 모르는 건 다 숙제고 쉬운 건 열심히 설명했지. 하고 나서는 꼭 물어봐, '알겠냐?' 그것도 영어로 understand?(* 지 아들을 Q라고 하던 인간이야) 애덜이 기막혀서 가만 있지. 그러면 신이 나는지 큰소리로 '왜냐?'하며 또 설명. 그렇게 2-3번 설명했다는 거야. 그런 놈한테 뭘 배워?
3학년 전공필수 간만에 들어갔더니 '너는 또 한번 결석하면 F고, 조원덕외 2명은 앞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해. F니까' 그 3명 중 하나는 학점에 여유가 있어 수강 취소하고 다른 2명은(* 취소하면 학기 취소) 눈 뜨고 F 맞았어. 난 D.
그 다음해 역시나 그 과목을 박세희가 담당했고 그 2명은 1년 후배들과 같이 들어야 했는데,
'작년의 경우에 비추어 몇 번은 더 빠질 수 있다'는 개소리하며 2명이 술 처먹고 있는 어느날,
출석 부르다 말다 하던 박세희가 그 2명이 안 보이니까 출석부 가지러 과사무실에 다시 갔다는 거야. 그걸 후배에게 전해듣고는 그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들어갔어, '저희들, 여기 있어요'하며. 심지어 수업거부 데모로 1년 후배들이 전부 결석했을 때에도 그 2명은 혹시나 하고 가보니 박세희가 나타났다는 거야.
4. 친교와 실력은 별개
같이 축구하고 술 마시고 떠드니까 '어시스트해서 교수님이 골 넣었다'며 A라고 떠드는 학생이 있었어. 성적대로 C, D 줬더니 그런 헛소리들 싹 사라졌지.
달달 외우는 다른 과목에서 잘한다는 애들 내 과목에서 많이 죽 쒔지. 한 여학생은 찾아와서 대학원 진학하려고 했는데 내 과목 듣고 포기했다고 하더군(* 뒤에 정봉화가 아까워했어, 미적분 잘했다며).
(3년차부터 맡게 된) 3학년 전공필수 집합론이 시금석이 되었고
서울대, 과기대, 포항공대 대학원 진학하려는 학생들이 날 많이 찾게 된 반면 다른 교수들과 술 처먹는 등 얼렁뚱당 A 받고 장학금까지 타는 애들은 날 웬수로 보고 정봉화의 깽판에 적극 가담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