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핵포기 무장해제된 카다피 살해

북한과의 약속 위반한 유대충의 미국 -리영희
세계 3위 핵보유국, 우크라이나 핵폐기 후...


유태영박사 | 입력 : 2010/07/20 [17:07]

카다피가 이끄는 <리비아>는 더 이상 미국의 봉이 아니다 - 이것은 국제사회가 공통적으로 평가하는 오늘의 리비아의 현주소이다.


▲ 카다피 유엔연설 도중 지켜지지 않는 유엔헌장을 비판하며 찢어버리는 행동도 보여주었다. ©자주민보, 뉴스데스크


카다피 대통령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제사회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1969년 9월 1일에 27세의 약관 대위로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을 페지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선포했고, 4년 후인 1973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교를 혼합한 이른바 <제 3세계 이론, Third Universal Theory>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인민주권선언>을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1977년 3월 리비아를 <사회주의 인민주권 민주주의> 나라로 건설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선 카다피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하면 지난 해 세계 주목을 받았던 일화가 있다. 그는 지난 2009년 9월 유엔 총회에 처음 참석해 국제사회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집권 40년만에 처음 있는 큰 사건이기도 했다. <평화의 전도사>로 세계의 관심속에서 유엔 총회에 등장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카다피 대통령이 그에게 허락된 15분의 연설 시간을 무시하고 무려 1시간 36분의 길고 긴 연설을 내뿜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카다피 대통령 보다 더 긴 기록도 있었다. 1960년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이 자리에서 4시간 30분 동안 일장 연설한 기록이 있지만 카다피의 연설 기록과 그 내용도 역사에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유엔안보리를 <테러 이사회>라고 직설적으로 지칭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40년 집권에 처음 유엔 무대에 등장한 카다피 대통령이 그 외 무슨 이야기를 연설했는가도 관심거리였다. 그는 당시 유엔 총회장인 알리 회장의 <왕 중의 왕>이라는 든든한 소개의 말을 들으면서 기분 좋게 연단에 올라섰다. 하지만 카다피 대통령의 길고 긴 연설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강대국 대표들에게는 결코 기분 좋은 내용들이 아니었다. 1시간 36분 동안 내뿜은 카다피 대통령의 길고 긴 연설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어 원문, 주: United Nations removed the English transcript of his speech from its website and western media removed the transcript from all types of media resources. MetaExistence Organization made an effort to restore the original transcript from his video speech. Gaddafi showed a actual evil face of UN and security council to the world. Truth always be truth . . . . You never hide it).

ㄱ. 핵 무기로 무장한 나라들이 구성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조직 자체가 테러조직이다. 유엔이 진정 세계 평화를 위한 조직이라면 아프리카연합도 평등하게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원국으로 동참해야 한다. 만일 이런 요구를 거부하면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니라 <테러 지원 이사회>라고 불러야 한다.

ㄴ. 서구의 강대국들이 역사적으로 오랜 동안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고 착취를 했다. 오늘 아프리카 나라들은 서구 강대국으로부터 착취를 되돌려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 서구 침략국들은 적어도 7조 7700억 달러를 아프리카의 가난한 피식민지 나라들에게 손해보상을 제공해 주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ㄷ. 911 테러범들은 이락이나 아프칸에서 비행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은 미국에서 훈련을 직접 받는 사랍들이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은 모두 다 미국이 길러 낸 조직인데 미국은 오히려 이들이 미국에 위험한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큰 모순 아닌가?

ㄹ. 미국의 지원하에서 이스라엘이 야만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를 공격하고 있는데 이런 공격 행위는 큰 죄악이다. 힘 없는 가자지구의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마구 살해 하는 이스라엘의 악행은 어느 종교의 이름으로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미국의 지원은 더욱 더 큰 죄악이다.

ㅁ. 1945년에 유엔이 창설되었는데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큰 전쟁만 65회 이상이 발생했다. 그런데 유엔은 이러한 큰 전쟁과 전쟁발생 원인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유엔은 무능해서 인가 아니면 고의적인가?

ㅂ.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음모를 비롯하여 소말리아 해적사건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음모는 밝혀져야 한다. 신종 플푸 사건으로 백신을 팔아 먹은 미국기업의 음모 등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모든 비밀 음모에 대하여서도 진상이 규명이 되어야 하고 책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ㅅ.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영국의 토니 총리는 이락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반드시 <이락전 전범재판>의 법정에 서야 한다.

ㅇ. 오바마는 아프리카의 아들로써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은 기쁜 일이고 자랑스럽다.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영원히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행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처럼 악마의 길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ㅈ. 미국은 서구의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하는 위선적 행태를 즉각 중단하지 않는다면 고삐 풀린 소련의 타락한 맑스주의자들처럼 비극적 운명의 종말에 이르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ㅊ. 카다피 대통령은 연설 도중에 유엔 헌장을 갈기갈기 찢어 던지는 돌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유엔 헌장은 모든 회원국들은 평등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거부권을 가지고 있는가? 이래도 우리가 과연 평등하단 말인가?"

카다피 대통령은 오직 강대국들의 손익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는 유엔안보리 5개상임 이사국의 불공정한 제도를 반드시 개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다피 대통령은 후에 CNN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해명 했다. <내가 하고자 했던 말과 행동을 했을 뿐이다. 유엔은 존경받을 수 없다는 점을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나는 유엔 헌장을 찢어 던졌다>

리비아 전통의 의상인 베두인을 입고 연단에 서서 1시간 36분 동안 연설을 한 카다피 대통령은 2006년에 같은 연단에 서서 부시 대통령을 가리켜 <악마>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동일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수전 라이스 유엔주재 미 대사는 카다피 대통령이 연단에 오르기 직전에 총회장을 빠져 나갔으며, 영국, 프랑스와 독일 등 친미적 서방 국가 회원들도 연설 도중에 퇴장했다. 하지만 카다피 대통령의 가시 돋친 비판의 소리와 풍자 섞인 비난의 연설이 폭탄처럼 계속될 때 총회장은 폭소와 박수갈채가 계속하여 터져 나오고 있었다.

1. 리비아의 간추린 역사

리비아는 북아프리카 중앙부에 위치하여 이집트, 알제리, 챠드, 수단 등 나라들과 이웃하고 있다.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4번째 큰 나라이며 코리아 반도의 8배의 크기 이지만 국토의 약 90%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는 약 610 만 명으로 추산된다.(2006년 현재)

종교는 절대 다수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주요 민족은 아랍계가 절대 다수이고 사하라 지역 원주민과 흑인이 각각 20%정도가 된다. 주요 언어는 아랍어로 되어 있다.

리비아는 옛 고대로 부터 유목민 베르베르인들이 살았으나 기원전 시대에 이르러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의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BC 631년부터 약 550년 동안 그리스인들의 동진으로 인하여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였다. 하지만 BC 86년부터 AD 4세기에 이르기까지 리비아는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놓여있었다. 로마제국의 쇠퇴로 리비아는 431년경에 일시 독일의 침략을 받았고, 5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리비아는 비잔틴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644년에 리비아는 아랍인의 세력에 정복되어 줄곧 이슬람 문화권에 지배를 받아 오다가 1551년부터는 오스만 터키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1911년에 오스만투르크와 이탈리아와 전쟁이 일어나 이탈리아가 승리하고 또 제1차 세계대전이 돌발하자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완전히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리비아는 격전지가 되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 비로소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떠나갔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리비아에서 떠나간 후에는 또다시 영국과 프랑스가 리비아 식민지 처리문제를 가지고 서로 싸우다 결국 1943년에 영국의 군부가 들어서서 리비아를 통치했다.

1951년에 UN에서 미국과 소련의 관여 하에 리비아의 3개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여 리비아 연방제에 의한 <리비아 연방왕국>이 창건되고, 모하메드 이드리스가 왕위에 올랐다. 1963년에 이드리스 왕은 연방제 왕국을 재편성하여 단일국가로 만드는데 일시 성공하지만 봉건적 왕권은 통치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서방 외세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드리스 왕정은 처음부터 워낙 약체인데다 리비아 국내에 서방 국가들의 군사기지가 상주하도록 허락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리비아에 석유가 새로 개발되는 최초의 과정에 있어서 처음부터 왕정과 외국자본 사이에 야합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왕정에 대한 국민감정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불안한 정세에서 1969년 9월 1일에 카다피 대위를 중심으로 한 12명의 육군 장교들이 18년 동안 왕정을 끌어 온 이드리스 왕을 축출하고 외세에 휘청거리고 있던 리비아 왕국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성공시킨다. 당시 카다피는 27세의 육군 대위로 쿠테타를 주동하면서 무능한 왕정을 폐지하고 미국을 비롯한 외세를 물리칠 수 있는 자주자립의 아랍공화국을 선포했다.

카다피는 독립 후 1972년에 이집트, 시리아와 리비아 세 나라가 연합하여 <아랍 연방>을 건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일시 성공한다. 하지만 아랍 연방은 이집트가 친이스라엘 정책을 독자적으로 주장함으로 리비아와 시리아는 탈퇴를 선언하고 세 나라는 각각 독립국이 된다.

1977년에 카다피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통령으로서 사회주의와 이슬람교를 혼합한 통치이념을 토대로하여 <제 3의 보편이론>에 근거한 반제 반서방정책을 지향하는 <리비아 인민사회주의 국가>로 새로운 국가 창립과 국가 명칭을 선포했다.

1979년에 카다피는 <9월혁명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국가 원수직을 확보하고 반시오니즘과 반미정책으로 미국과 단교하고 러시아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튼튼히 했다. 국토의 3% 이하에 불가한 경작지 농토를 가지고 있는 빈곤한 리비아였지만 리비아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오늘의 리비아는 세계 제8위의 산유강국이 되었다. 북조선과는 1974년에 외교를 수립했다.

2. 카다피 대통령의 통치이념

카다피는 누구인가? 카다피의 통치이념는 무엇인가? 카다피는 리비아 북부 사르테 사막지대에 있는 한 천막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항전에 사망했고 아버지도 역시 이탈리아 항전에 항상 투쟁하면서 어린 카다피에게 독립 애국심을 키워 주었다.

카다피는 아버지의 자녀교육에 대한 정성 덕으로 출생지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를 거쳐 1963년에 벤가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카다피는 영국의 육군 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 카다피는 학창시절에 항상 혁명에 관한 연구를 즐겨했으며 육사 학생시절에 벌써 <자주 통일주의 장교단>을 만드는 등 남다른 지도자적 자질을 보여주었다.

그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즐겨 마시지 않으면서 코란을 즐겨 읽는 검소한 생활을 하며 스스로 미래의 지도자상을 그리며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카다피는 리비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위대한 지도자이지만 지금도 유년시절에 사르테 사막지대에서 태어나 살던 곳을 홀로 찾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카다피는 어릴 때 정들었던 흙담집을 찾아가 흙 냄새를 맡으면서 오늘 자본주의적 착취세력들을 <인민의 적>으로 여기고 그 극복을 사색 염원 했었는지도 모른다.

카다피는 오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말하는 정당제도는 근대적 부족제도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종파제도라고 혹평한다. 이러한 부족제도적 정당정치 아래에서는 참된 인민을 대표하는 정치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럼으로 카다피는 주장하기를 "인민위원회에는 직접민주주의 제도에 의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집행기관이 있음으로 족하며 이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는 독재자들의 이용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카다피 대통령은 집권 이후 국토개발과 교육 사업에 주력하여 문맹율을 90%에서 50%로 낮추었다. 그 당시 400만명이 조금 넘는 총인구 가운데 140만 명을 무상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게 했으며 여성을 문교장관과 문공차관으로 임명하는 사회적 개혁 정치를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카다피 대통령은 소련을 비판하는 발언을 가끔 했지만 사실은 친 소련파였다. 그 당시 소련으로부터 10억 달러의 무기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인구가 작은 리비아는 군인보다 군장비가 더 많은 나라가 되었으며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상주하고 있기도 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79년에 리비아의 반미 폭도들이 미국 대사관에 진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리비아는 미국과 1982년에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한다.

1984년에는 주 런던 리비아 대사관에서 반 카다피 데모가 일어났는데 이때 리비아군의 발사에 영국 여자경찰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영국과 리비아의 국교도 단절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카다피 대통령은 여러 차례 저격 암살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 때마다 그 위기를 넘겼다. 카다피 대통령은 그 때 미국에 암살단을 보낸다고 엄포를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레이건 대통령은 그 위협이 무서워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 당시 카다피는 레이건을 겁쟁이라고 조롱하며 비꼬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은 1986년 4월에 레이건 대통령의 명령으로 리비아를 공격했다. 미국 비행기들이 카다피 대통령 관저를 폭격했다. 이 바람에 카다피 대통령은 무사했지만 그의 아들 한 명이 죽었다. 그 이후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 냉전이 계속되었고 서로 상대방을 경계하며 적대시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3. 팬암 항고기 폭파 사건과 배후의 흑막

1988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를 불과 며칠 앞두고 승객 270명을 태운 미국의 팬암 항공기가 스코트랜드의 로커비 지역 상공에서 폭발추락 했다. 이 사고로 인하여 스코트랜드 로커비 마을 주민 11명도 사망했다. 그 때 서방은 리비아를 일제히 중동의 테러조직으로 지목했다. 이 사건 발생 3년 만인 1991년 9월에 미국은 리비아인 2명을 리비아의 정보원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범인으로 기소했다. 리비아는 테러 주범으로 지목된 2명의 범행을 부인하는 한편 리비아인 2명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그 후 10년 동안이나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1999년 4월에 리비아인 2명을 스코트랜드 법정에 넘겨주도록 카다피 대통령은 전격 합의를 했다. 이 합의에는 넬손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의 중재 역할이 크게 작용하여 타협이 이루어 진 것으로 밝혀졌다.

리비아의 2명이 주범으로 스코트랜드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2001년 1월 31일에 스코트랜드의 최고형벌인 무기징역이 알메그라히에게 선고되었고 다른 한 명은 무죄로 판결받고 리비아로 귀국했다. 리비아의 알메그라히는 팬암 비행기 폭파의 책임을 혼자 몽땅 뒤집어 썼다. 그런데 팬암 비행기 폭파 사건의 진실은 날이 갈수록 흑막으로 가려지고 있다. 스코트랜드 감옥에서 테러범의 죄목으로 종신형 죄수로 갇혀있던 알메그라히는 감옥생활 8년 후인 2009년 8월에 갑작스럽게 석방되었다.

영국은 석방 이유를 중병환자이기 때문에 인도적 배려로 석방한고 설명했다. 석방된 알메그라히는 카다피 대통령이 보낸 특별 개인 비행기로 트리폴리 공항에 도착했으며 수 천 명의 군중은 그에게 꽃가루를 뿌려 주면서 영웅처럼 환영하며 환호해 주었다.

그리고 팬암 비행기 폭파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지불할 보상문제를 미국과 영국이 제시한 비밀 합의 결과로 총 27억 달러를 지불하도록 2003년 8월에 완전히 합의했다. 하지만 리비아는 <보상>이라는 언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다만 <위로금>이라고 주장했다. <위로금>이 해결되자 유엔 안보리는 곧 리비아와 단절되었던 외교관계를 즉시 회복한다고 발표했다. 수감 중이던 알메그라히를 갑작스럽게 석방한 그 배경에는 또 다른 흑막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로이터 통신은 영국이 리비아에서 석유를 얻어 내기 위한 전략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은 아프리카 최대의 석유매장지가 리비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에 BP의 석유 개발계획이 알미그라히의 석방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로이터 통신의 보도를 뒷바침하는 카다피 대통령의 아들의 증언 이 있다. 그는 석방하는 알미그라히와 동행한 비행기 안에서 행한 기자 회견에서 말하기를 <영국이 알메그라히 석방을 위하여 힘 쓴 것은 리비아에서 석유와 가스의 개발 계약을 얻기 위함이다>라고 언급한데서도 나타났다.

그러면 팬암 비행기 폭파의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팬암 비행기 폭파의 진짜 범인은 따로 숨겨져 있는가?

이와 같은 의혹과 질문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거래설 이외에도 보다 더 높은 정치적 차원의 의혹이 아랍권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과 그 밖에 전 세계에서 그침 없이 제기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의혹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은 해답과 물증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주요 자료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ㄱ. 1988년에 영국 스코드랜드에서 발생한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의 범죄 용의자를 12년 만에야 억지로 판결하는 것은 검찰이 진짜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고 가설에 의하여 판결한 증거이다. 영국과 미국의 수사당국은 수사 과정에서 1만 5000명을 만났고, 18만 건의 물증들을 확보 했으며 1000명 이상의 증언을 수집했다고 큰소리치면서 사실은 줄곧 <물타기> 수사를 진행 했다. 그러면서 이 어마 어마한 큰 사건의 범죄자로 지목한 알메그라히에게는 겨우 27년의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와 같은 판결은 검찰이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한 실패한 정략적 재판임을 의미한다.

ㄴ. 사건발생 초기에 범인으로 등장한 용의자는 분명히 팔레스타인 <아부 탈브>와 요르단인 <크리사드> 그리고 리비아인 <알메그라히> 3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브 탈브>와 <크리사드>는 재판과정에서 갑자기 제외 됐고 오직 리비아 인 <알메그라히>와 또 다른 리비아인 이렇게 총 두 사람만 재판을 받았다.

이란인 아브 탈브는 재판과정에서 유리한 증거를 제시한 대가로 평생 기소 <면책특권>을 부여 받았다. 그리고 요르단인 크리사드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기가 막힌다. 크리사드는 CIA에 연유된 인물로 알여졌었는데 팬암 항공기 폭파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 폭탄 기폭장치의 <기압식 타이머>가 체포당시 그의 차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증거불충분 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문제시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히 공작정치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이들은 모두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첩보원인 동시에 한편 CIA와 연유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하여 스코트랜드의 노동당 전 하원의원인 탐 다옐은 말하기를 팬암 항공기 재판은 "정의를 상실한 재판이며 리비아인 알메그라히는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 뿐이다. " 라고 공식 발언을 여러 번 했다.

ㄷ. 검찰이 리비아인 알메그라히에게 유죄를 단정하는 근거는 사건 현장에서 부터 25km나 떨어진 곳에서 얼마 후에 발견한 이상한 가방이다. 이 이상한 가방의 안에는 시한장치의 폭탄과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 옷을 알메그라히가 입었다는 아무 증거가 없다. 다만 그 옷의 판매자로 확인된 옷 상점 주인의 증언에 의하면 50대와 180cm 이상 큰 남성에게 그 옷을 판매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알메그라히는 36세이며 그의 키는 174cm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옷 상점에서 옷을 산 사람들 중에는 CIA 요원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와 같은 신빙성이 전혀 없는 증거를 이용하는 검찰 행태에 대하여 언론의 일각에서는 리비아에게 죄를 뒤집씌어우기 위하여 <시한장치폭단과 옷가지>가 들어 있는 이상한 가방을 그곳에 갖다 놓은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ㄹ. 검찰의 재판이 이와 같이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고 폭파사건의 재판을 진두지휘를 해온 주임검사는 재판에서 패배할 것을 염려하여 도중에 사표를 냈다. 그는 영국과 미국이 확실한 단서를 잡지 못한 채 오히려 증거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표를 낸다고 밝혔다.

ㅁ. 미국은 처음에는 이란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1987년 7월 3일에 미국이 이란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하고 미사일을 발사해 추격시킴으로써 200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이란이 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팬암 항공기를 추락시켰거나, 아니면 이란이 팔레스타인의 테러 조직을 이용하여 비밀로 팬암 항공기에 대하여 보복공격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팬암 항공기 폭파 범행국가를 처음에는 이렇게 이란을 지명했고, 그 다음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의심을 하다가 최종으로 범행국가를 리비아로 지목하는 연극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이런 뒤집어씌우기용 자작극을 이렇게 늘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해왔다.

미국의 이른바 9/11테러 사건, 월남의 통킹만 음모 사건, 이락의 대량 살상 무기 음모 사건 그리고 바로 최근의 한국의 천안함 침몰사건 등은 모두 다 미국의 자작극 음모사건들로 보는 견해들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 팬암 항공기 사건이 발생했던 1988년 그 당시에 미국의 국가안보국 NSA의 1년의 경비는 40억 달러였으며 CIA의 1년의 경비는 30억 달러였다고 한다. 이 두 조직은 모두 다 미국의 안보를 위한 국내와 국외에서 활동하는 비밀조직이다. NSA의 경우 1시간에 약 1 백만 달러 이상을 쓴다는 얘기다.

아와 같은 막대한 돈으로 미국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1988년 팬암 항공기 폭파사건도 당시 사고기에서 25km 지점에 이상한 가방을 갖다 놓고, 그 가방을 정보원이 발견했다고 연극을 꾸미면서 리비아를 범죄국가로 지정했다는 씨나리오를 꾸민 것으로 세인들의 의심을 받았고 미국은 기어이 리비아인 알메그라히를 테러범으로 만들어 냈다. 미국은 리비아의 알메그라히를 즉시 기소하여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이른바 인도주의라는 애매한 명분으로 수감된지 8년 만에 알메그리하를 석방 했던 것이다.

4. 리비아는 왜 핵 프로그램을 포기 했나?

한국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카다피 대통령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카다피는 광주학살 사건의 주모자라는 것을 이유 삼아 초청을 거부했었다. 만약 카다피 대통령이 서방의 언론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독재자라면 독재자들끼리 상통했을 것이다.

리비아가 2003년 12월에 핵을 포함한 대량상살무기 개발을 포기한다고 발표한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도 절대로 미국에 항복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카다피 대통령은 2003년 12월의 핵 포기선언 이후에 오히려 이전 보다 더 강하게 반미를 이야기하고 아랍 민족의 단결과 해방을 더욱 더 강하게 외쳐왔다. 진실을 말하자면 카다피는 아랍국가들에 대하여 너무나도 실망스러워 통탄했다.

카다피는 아랍 이웃 국가들을 통하여 미국과 1대 1의 대화의 통로를 열어 보이고 선의의 메시지를 수차 보내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일부의 이웃 아랍 국가들 중에서는 카다피의 선의의 메시지는 전달하지 않고 오히려 왜곡하여 리비아에게 불리한 역할만을 했을 뿐이었다. 카다피는 일부 아랍 국가들에 대하여 몹시 통탄 했다.

카다피 대통령은 아랍 이웃 국가들을 완전히 배제한 조건하에서 단독으로 미국과 직접대화의 통로를 모색했다. 2000년을 전후하여 5차례 카다피와 클린턴 행정부와 비밀 접촉을 했다. 9.11테러 사건 이후에 2003년 12월까지 카다피 대통령과 미국 부시행정부는 런던에서 또 5차례에 걸쳐 비밀 접촉을 했다. 이렇게 무려 10 차례에 걸친 극비의 접촉을 통하여 미국이 얻어 낸 것이 이른바 리비아의 <핵 포기선언>이었다. 하지만 리비아의 <핵 포기선언>의 손익 계산을 따져 보면 손해를 입은 쪽은 미국 이고 이익을 챙긴 편은 분명히 카다피인 것을 세계는 다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이익을 챙기기 위하여 카다피 대통령은 단독으로 꾸준히 무려 10차례에 걸쳐 비밀 접촉을 시도하여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와 회의를 진행했던 것이다.

카다피 대통령은 핵 포기선언을 한 후에 중동과 리비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하여 전 세계는 모두의 관심거리로 집중하고 있었다. 카다피 대통령은 핵 포기 선언 후 줄곧 CNN 등 서방 언론에서 이스라엘도 우리처럼 핵 포기를 선언하여 중동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하여 밀하기를 그들의 주장대로 평화를 위해서 자위적 목적이며 또한 평화적 용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원과 격려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크리스천사이언스 모니터지와 같은 주요 언론들은 2003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수백 번 계속하여 <북, 이란도 리비아 성공사례 배워라>라고 반복 주장하고 있는데, 남한의 조-중-동 같은 보수족벌언론들은 앵무새처럼 미국 언론의 주장을 약속이나 한 듯 되풀이만 하고 있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카다피의 핵 포기선언 후에 리비아에서 카다피를 제거하는 정권교체가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은 미국의 실패이며, 또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리비아에 대하여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 주는 것은 더 큰 실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카다피 대통령은 주장하기를 <리비아가 핵 프로그람을 폐기하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지만 미국으로 부터 아무런 보상을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라고 정면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카다피 대통령은 오늘 날 여전히 과거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반미주의자 3인방>으로 맹활약 하고 있다.

2006년에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을 <악마>로 지명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차베스는 미국의 온두라스 쿠테타 개입과 미국-콜롬비아 군사협정을 제국주의자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이어 2008년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리고 원유를 이용하기 위해 이라크와 아프칸을 침공하고 있다"라고 공격했다. 그는 또 미국이 중동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스라엘 시오니즘 제국을 만들어 놓았다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2009년에도 카다피의 자세는 같았다. 그의 유엔 총회에 등장해 토해 낸 연설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이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이라크 전범자로써 반드시 국제재판소에 서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리비아와 남한과의 관계는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변화를 보였다. 2006년 9월20일에 당시 남한의 한명숙 국무총리가 카다피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 때 카다피 대통령은 한명숙 국무총리를 장시간 영접하여 대화를 나누면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카다피 대통령은 그 때 <우리 친구 노무현 대통령은 안녕하신가요?> 라고 안부를 물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초청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독재자라고 말을 했던 그가 이번에는 <나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말을 한 것은 이회창을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한 남한 당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이기에 축하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카다피 대통령는 2009년 9월 28일 베네수엘라에 국빈으로 방문했다. 그런데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국가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해방자의 검>을 선물로 카다피 대통령에게 증정 했다. <해방자의 검> 선물은 두 대통령들이 서로 반미투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맺는 말

미국은 북-미간 핵 대결에서 리비아를 끌어 들이면서 잠정기간 동안 그와 같은 해법을 주장해 왔다. 남한 당국도 역시 북조선이 리비아 해법을 본받아야 한다고 무조건 미국의 주장을 추종해 왔다. 이에 대하여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은 "우리는 그 누구의 영향을 받아 좌우하지 않으며 오로지 양편이 상호 공정한 길을 따를 뿐이다"라고 주체적인 입장과 자세를 일관되게 보여왔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오늘 리비아 해법을 어기고 있는 편은 바로 미국이다 .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당시 리비아 해법을 담당한 주역들은 미국의 외교의 온건파로 알려진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 보좌관과 역시 중동 정책에 있어서 온건파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 두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온건책은 절대로 <선제공격 전략>이나 <깡패국가 호칭>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만 리비아에 대하여 <예방 외교와 비확산 조약> 을 맺으며 그리고 경제제재를 풀어주고 유인책을 제공해 준다는 조건의 약속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그 당시 리비아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직면한 어려움이 있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고립된 어려움도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의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2003년 12월 19일에 리비아는 대량살상 무기(WMD)로 알려진 핵 포기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은 핵포기를 선언한 리비아에 대한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대외정책은 또다시 그 신뢰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카다피 대통령의 반미 감정은 또 다른 차원에서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와 같은 신뢰문제는 비단 리비아에 국한되지 않는다. 북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에 북미관계에 있어서 미사일 문제를 포함한 정상화 및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공동 성명서 채택에까지 이르러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 디씨에 오고, 알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평양에 가는 등 일련의 화해분위기와 함께 양국 관계정상화 수순이 진행되어 왔으나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자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북미평화교섭을 위한 성과들을 모두 폐기처분하고 백지화함으로써 북미관계가 다시 냉각관계가 되었던 것도 미국의 대북정책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 즉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부시 대통령의 집권 제 1기와 2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네오콘 세력은 줄곧 북조선 공화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오늘도 선제공격의 대상으로 요지부동하게 적으로 규정해 놓았다. 6자회담의 진행과정에서도 미국의 신뢰성은 번번이 깨지고 말았다. 미 당국과 미국언론들, 그리고 서방언론들은 북조선이 신뢰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서 회담이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다. 리비아와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외교적 약속이 미국에 의해 지켜지지 못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증명되어 왔다.

그러면서 미국의 지배세력인 네오콘은 북조선도 <리비아 모델>을 본받아서 핵 포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핵 포기를 하여야 할 나라는 북조선이나 이란과 같은 나라들이 아니라 약소국들을 침략하고 괴롭혀 온 제국주의 나라 미국이다. 인류의 핵문제는 사실상 강대국들의 문제이다.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착취해 온 제국주의 나라들이다. 다른 나라의 침략이 두려워, 그리고 핵우산을 가지고 위협하는 제국주의 나라들의 침략이 두려워 핵억지력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든지 그 침략을 막고 주권을 지키려고 핵억지력을 개발하려고 하는 나라들에게 핵보유국들은 무슨 말로 설득할 수 있겠는지 묻고 싶다.

지금 리비아는 세계 8위의 산유국이며 아프리카 제 1위의 산유국이다. 리비아의 석유를 미국만 독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 중국도 리비아 석유시장 진출에 성공하고 있다. 리비아의 석유 매장량은 확인된 것만도 415억 배럴이며 또한 천연 가스 매장량도 1조 3,250억 입방미터에 달해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2003년에 핵 포기를 선언한 리비아는 오늘<평화적 핵개발>에 다시 나서고 있다. 리비아는 <평화적>이라는 명칭 아래 현재 러시아, 프랑스, 우크라이나 그리고 캐나다 등 많은 나라들과 원자력 공동개발을 위한 공동각서에 서명했다. 뿐만 아니라 리비아는 풍부한 사막지대의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도 개발하여 2020년까지 전체 전력의 10%를 공급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리비아는 지금 아프리카의 선도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카다피 대통령은 과거 서방과 미국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카다피 대통령에 의해 영도되는 산유국, 리비아의 움직임이 서방과 미국의 두려움이 되고 있다.

미국의 한 고위 관리가 금년 2010년 3월에 카다피 대통령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카다피는 리비아의 국가원수로서 지각없는 행동을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리비아는 그의 발언에 대하여 거센 반응을 보이면서 "만일 미국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리비아는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겠다."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결국 미국 정부는 리비아 당국에게 즉시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카다피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미국의 눈엣가시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사건건 <못 말리는 카다피 눈엣가시>로 존재하고 있다. 리비아와 미국의 껄끄러운 관계는 여전하지만 과거에 비해 카다피 대통령이 영도하는 리비아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중론이다.

다시 말하면, 카다피 대통령이 이끄는 리비아, 이 나라는 더 이상 미국의 봉이 아니라는 사실이 현실로 증명되고 있다. 리비아뿐만 아니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나라들, 쿠바와 베네주엘라를 포함한 남미 나라들, 아프리카 나라들, 북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 모두가 미국과 그 맹종국들인 이스라엘, 일본, 남한 등 친미성향 나라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동안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온 지구촌 제3세계 나라들도 이제는 더 이상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나라들로부터 간섭과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자주권 쟁취를 위한 투쟁의 파고가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도 미 당국은 물론 그에 맹종하는 나라들도 심각하게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유태영 박사 2010-07-17]
기사입력: 2010/07/19 [06:17] 최종편집: ⓒ 자주민보

[2018.3.2] 초서도브스키, “한미방위조약 파기, 남북평화협정 체결”, 문재인이 가야할 길

초서도브스키 교수, “한미방위조약 파기, 남북평화협정 체결” 주장코리아국제평화포럼 등 주최 ‘전쟁의 세계화와 한반도 평화’ 초청토론회 발제

김장호 기자승인 2018.02.22 16:49

지난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쟁의 세계화와 한반도 평화(North Korea and the Dangers of Nuclear War)”를 주제로 미셸 초서도브스키(Michel Chossudovsky) 초청 토론회가 열렸다.
미셸 초서도브스키 교수는 지난 1997년 한국 외환위기가 미국과 IMF의 한국경제 침탈 과정임을 밝힌 저서 <빈곤의 세계화>로 국내에 잘 알려진 진보석학이다. 현재 캐나다 오타와 대학 명예교수이자 세계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 20일 여의도 국회 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전쟁의 세계화와 한반도 평화(North Korea and the Dangers of Nuclear War)” 초청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하고 있는 미셸 초서도프스키 교수.

(사)다른백년, 코리아국제평화포럼,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연구회가 공동주최하고, 사단법인 다른백년이 주관한 이날 토론회는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이날 토론회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사회를 맡고, 이정훈 민플러스 국제팀장, 이래경 다른백년 이사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기조발제에 나선 초서도브스키 교수는 “최근 정세는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제3차 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언제든 핵을 사용할 독트린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미국을 우회하는 해법으로 “한미공동방위조약 파기”와 “남북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일 여의도 의원회관 제7간담회실에서 열린 “전쟁의 세계화와 한반도 평화(North Korea and the Dangers of Nuclear War)” 토론회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아래는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발제요지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니누크와 같은 전술핵 무기를 개발하여 ‘코피(bloody nose)’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어쩌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첫 번째 선제 핵공격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다.’

저강도 소형핵무기 위험성

미국언론은 트럼프 행정부 내 강력한 군사정보 파벌이 “북한에 대한 선제 군사타격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이 “코피(bloody nose)” 공격이라고 명명한 이 작전에는 북한 미사일 시설에 대한 재래무기공격 혹은 저강도 소형 전술핵무기 공격을 포함한다.

미국은 1조 2천억 달러에 달하는 핵무기 강화 예산을 편성했다. 그리고 트럼프의 2018년 핵 태세 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는 핵무기를 지닌 국가 및 핵무기가 없는 국가에 대한 선제 타격에 활용할 수 있는 저강도 소형 핵무기 개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미니누크라고 불리는 소형 핵무기(B61-11, B61-12)들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3에서 12배에 이르는 폭발력을 지닌다. 이들 “보다 편리한” 핵무기란 핵탄두를 장착한 벙커 버스터로, 펜타곤과 계약한 기업들의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폭발이 지하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주변 민간인들에게 무해하다”고 한다. 이들 소형핵무기를 대북 선제공격에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B61-12 스마트 전술 소형 핵폭탄. 워싱턴이 “코피(bloody nose)” 공격이라고 명명한 작전은 북한의 미사일 시설에 대해 소형 전술 핵무기 공격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외교채널의 실패

지금의 위기는 55년 전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 상황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당시 워싱턴과 모스크바 모두 상호확증파괴의 위험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펜타곤은 히로시마 원자탄의 최소 1/3에서 6배의 폭발력을 지닌 전술 핵무기를 “지하에서 폭발한다는 이유로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무기로 분류한다.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은 핵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최소한의 희미한 관념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외교 채널마저 붕괴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한 안보 위협인가?

북한은 1950년대에 미국이 주도한 폭격으로 인구의 30%를 잃었다. 이 사실은 세계 평화에 대한 이른바 북한의 “위협”을 평가하는 데 중요하다. 미국은 북한 인구의 30%를 죽인 사실에 관하여 사과한 적이 없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미국은 자국이 주도한 전쟁의 피해자들을 악마화하는데 집중했다. 워싱턴은 반세기 이상의 기간 동안 북한을 정치적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미국이 뒷받침했던 평양에 대한 제재는 북한 경제의 와해가 그 목적이었다. 거짓이 진실이 되었다. 북한은 위협의 대명사가 되고, 미국은 이제 침략자가 아니라 “희생자”이다.

핵전쟁, 누가 침략자인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난 67년 동안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렸다. 한국전쟁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과 북한 모두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15일자 기밀문서에는 “펜타곤이 주요 도시 지역에 대한 조직적인 핵 공격을 통해 소련을 폭파시키는 계획을 고려했다”는 내용이 들어있고, 66개 “전략” 표적 목록에는 소련의 주요 도시가 모두 포함되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타슈켄트, 키에프, 하르코프, 오데사 등 규모가 큰 각각의 도시에는 6개의 핵무기가 사용될 예정이었다. “소련을 지도에서 지우기” 위해서 총 204개의 폭탄이 필요할 것으로 펜타곤은 추산했다.

히로시마 독트린의 한국 적용

코리아에 대한 미국의 핵 독트린은, 대부분 민간인을 대상으로 했던 1945년 8월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 이후 확립되었다. “세계는 첫 번째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군사기지에 떨어졌음에 주목할 것이다. 첫 번째 공격에서 가능한 한 민간인들을 죽이지 않기를 우리가 원했기 때문이다.”(1945년 8월 9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 그러나 첫 번째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것은 1945년 8월 6일이며, 두 번째가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은 트루먼이 라디오 연설을 했던 날과 같은 날인 8월 9일이다. 1945년 8월 9일에 했던 그 라디오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핵무기 사용에 관련하여 신이 미국 편이라고 말했다.

핵전쟁의 위협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과 그 동맹국들로부터 나온다.

북한에 대한 지속적인 위협과 잠재적 공격 행위는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미국의 거대한 동아시아 군사 전략의 일부이다.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방위협력협정으로) 남측 군사력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와 중국을 위협하는 것이다. 남북통일이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것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이다.

미국은 지난 67년 동안 핵무기로 한반도 민중을 위협하여 왔다. 한반도 비핵화란 오로지 북한을 향한 것이다. 미국이 축적하여 온 대규모 핵전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핵무기를 금지하고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위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수단”에 관한 협상을 소집하려는 유엔 결의안 L.41에 찬성한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이 북한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중대한 군사작전에서 가까운 동맹국이 미국을 도와 행동하도록 시도하여 왔다. 북을 상대로 한 군사행동에 미국이 홀로 나서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또 하나 위태로운 것은, 남의 군사력을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펜타곤의 지휘 아래에 두는 한미공동방위협력협정이다. 남의 군사훈련 참여 거부가 핵심인데, 한미공동방위협력협정 폐기가 대단히 중요하다. 남한이 군사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남북의 양자 평화협정을 위하여

현 단계에서 해결책은 남과 북이 평화 협상을 거부하는 미국을 무시하고, 양자 평화조약을 교섭하는 일이다. 남북 평화조약을 통하여 한반도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한미연합사령부와 작전지휘권의 폐지가 필요하다. 2014년 박근혜 정부가 작전지휘권의 폐지를 “2020년대 중반까지” 연기했는데, 이것은 “충돌이 벌어질 경우” 남한의 모든 군사력이, 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펜타곤이 임명한 미군 장성의 지휘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한미 연합사령부 구조와 작전지휘권 협약의 폐기 없이, 남한이 적절한 주권 회복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문재인 정부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남북 양자 평화협정은 1953년 정전협정의 실질적 폐기로 이어질 것이다. (정전협정 하에서 만연해 온) 미국과 북한의 “전쟁 상태”를 “우회”하고 이를 남북의 포괄적인 양자 평화협정 서명으로 무효화시키는 방안을 추구해야만 한다.

양자 간의 합의는 워싱턴의 거부를 사실상 우회하게 된다. 이는 또한 남한에서 미군의 철수와 작전지휘권 협약의 폐지도 함께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남북의 양자 평화회담의 방향키를, 외부 세력의 참여나 간섭 없이,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에 부과된 경제제재의 해제는 물론 미 점령군의 철수에 관한 논의가 회담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미군의 배제와 점령군 28,500명의 철수는 남북의 양자 평화조약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코리아가 존재한다.

워싱턴은 통일을 반대하는데, 이는 통일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통일에 관해 워싱턴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외국 투자자들”을 침투시켜 북한 경제를 약탈하는 것이다. 또한 주한미군을 통해 워싱턴은 남한을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 상황은 북한과 남한 모두를 향한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는 한, 미국과 남한은 “동맹”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해야만 한다.

한반도의 통일은 산업과 군사 측면에서 경쟁 세력이자 (선진 기술과 과학 역량을 지닌) 국민 국가의 출현이며, 이 국민국가는 스스로의 주권을 주장하고 워싱턴의 참견 없이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무역관계를 확립하게 될 것이다. 분단된 한국은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이익에 복무할 뿐이다.


▲ 20일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쟁의 세계화와 한반도 평화(North Korea and the Dangers of Nuclear War)” 토론회에 참가한 토론자들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선 이정훈 민플러스 국제팀장은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발제는 한반도 바깥에서 보는 한반도 평화문제와 북한(조선)을 보는 시각이 국내학자들보다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국내학자들이 국가보안법과 남북대치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스스로 검열하는데 익숙해 있는데, 이를 돌아보게 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 국제팀장은 이어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하지만 남북평화협정은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첫째로 남북평화협정은 과거 미국이 군사적 실권이 없는 남을 내세우고 미국은 뒤로 빠져 평화협정의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려고 내세웠던 안으로 이미 폐기된 안이라는 점, 둘째로 평화협정의 목적이 평화체제 구축에 있는데, 핵심 당사자가 빠진 평화협정으로는 궁극적 평화체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 셋째로 남북평화협정의 전제는 전시작전통제권이 남한으로 이양되어야 하는데 형식적 변화가 있더라도 실질적 권한을 남한이 행사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 넷째로 문재인 정부에서 미군으로부터 완전 독립된 실질적 전작권 이양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 다섯째로 종속적인 한미동맹 구조를 뛰어넘기 힘들다는 점 등 때문에 남북평화협정 실현가능성은 낮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실질적인 전작권 확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와 주한미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는 대중여론과 이를 추진하는 진보정권의 등장을 통해 해결하여야 하며, 평화협정은 남북미 3자 또는 북중미남이 포함된 3~4자 협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토론자로 나선 이래경 다른백년 이사장은 “한미군사훈련은 북한의 대남침략억제용이 아니라 북한 붕괴와 중국봉쇄를 염두에 둔 협박적 선제적 전쟁대비 훈련”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북한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대한 비판 역시 국제법상 허용된 국방자주권의 범위와 충돌되는 지점이 있으며, 인도는 그대로 놔두고 북 핵시험만 문제삼는 미국의 이중적 모순적 태도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또한 북핵은 “남한 적화통일용이라기 보다는 주체적 국가생존을 위한 비장의 선택”이며(*예: 리비아의 카다피), “미국이 북과 평화협정을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측면이 있는 만큼 미국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면서 “비핵화의 유일한 통로는 제네바 협정 정신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래경 이사장은 남북 상호불가침 평화협정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전제로서 “양국체제론”의 승인을 들었다. 헌법 내 영토조항, 국보법 개정 등 남남갈등을 야기하는 냉전구조부터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도 “동아시아 안전보장과 평화유지군”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자고 제안했다. 주한미군의 공백은 힘의 불균형을 가져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였다.

세 번째 토론자로 나선 박순성 동국대 교수는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주장이 한국 시민사회에서 수용되고 정부정책 변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서나 유보적 의견이 필요하다면서 몇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미국이 주창하는 “핵무기가 평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허구성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나, 이러한 논리는 북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면서, 일방적으로 미국만 비판해서는 한국 시민을 설득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남한이 미국의 일방적 군사행동을 거부하고, 한미합동군사훈연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주장은 합리적이고 당위적이나 미국의 군사주의적 전략과 함께 북한의 군사주의 전략 역시 지적되고 수정되어야 함을 피력했다. 마지막으로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남북평화협정 제안에 대해서 전략적 이해관계 당사자이자 ‘결정적 게임 체인저’인 미국을 제외하고는 실효성이 없는 만큼 장기간에 걸친 다방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미셸초서도프스키 교수

청중 질문과 토론에서 핵심은 결국 “미국” 문제로 모아졌고, “북핵에 대한 견해”로 집중되었다.
정리토론에서 초서도브스키 교수는 남북평화협정은 수단에 불과하고 자기 제안의 본질은 결국 평화협정을 회피하고 전쟁을 추구하는 미국으로부터 남한 정부가 군사적 주권을 회복하는 문제라고 지적했으며,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북핵이 아니라 미국의 핵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아래에서 미셸교수의 발제문(한글 및 영문)을 볼 수 있다.

북한과핵전쟁위험_미셸초서도프스키_한글 발제문(PDF)

https://drive.google.com/file/d/1_xVhWv-QJjQSkEmy2PzRNhawckW5Y6mz/view?usp=sharing

북한과핵전쟁위험_미셸초서도프스키_영문 발제문(PDF)

https://drive.google.com/file/d/186M-77x1_o5nAnzeupkS0j3lg_krurr7/view?usp=sharing

민플러스 김장호 기자 jangkim2121@gmail.com

[2018.6.3] 6.1일자(미국 시간) 김영철-트럼프 회담 관련하여

북한은 '한반도비핵화'를 일관되게 주장하는데, 한미일은 '북한의 비핵화'를 상정하며 한국의 정부관계자 및 언론 그리고 한반도 전문가들은 미국의 '희마사항'을 가지고 장편소설을 써대며 마치 북한의 핵과 ICBM을 폐기조치, 이에 대한 체제보장, 경제보상을 해주겠다는 식으로 몰고 가니 과연 이번 북미회담이 어떨지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웃긴게 뭔 줄 아십니까? 미국은 북미정상회담이 트럼프식의 고강도 전략과 압박으로 북한이 어쩔수 없이 회담에 응하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 한국은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이라는 중재자 역할 덕에 남북회담, 북미회담이 개최되었고 개최 될 예정이라고 홍보한다 그겁니다.

북의 입장에서 보면 가소롭다고 하겠습니다. 솔직히, 김일성, 김정일 집권시절에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이 '평화협정'을 맺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북의 그런 주장을 일언지하에 무시하고 거절하며 외면해왔었다 그겁니다. 장장 60년동안 말입니다.
지금은 미국 본토 구석구석까지 북의 핵무기 위협이 된다고 하니, 이제와서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언급을 끄집어 내며 북에게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체제를 보장해 주겠다'하는데 이것조차 북이 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핵심은 대등한 선에서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며 적대관계를 청산하자는 것인데도, 그것은 부차적인 것인양 핵심의제를 피하며 경제적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요?
이 웃기는 이야기가 김계관, 최선희 담화 이후에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죠.

북의 '비핵화'는 '한반도비핵화'이고, 이것은 종전선언, 평화협정, 적대관계 청산 그리고 상호신뢰 속에서 군사적, 외교적 관계 회복 속에서 자연스레 북의 핵문제는 해소될 것인데도
미국과 그 주변 동맹국은 변화하지 않는 채, 북에게 일방적인 핵을 포기하라고 하면 그게 과연 타당하냐에 대해 한국의 전문가, 정부당국자, 언론 그 누구도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그겁니다. 겨우 한다는게 김정은 신변보장, 체제보장, 경제보상? 이게 말인지 막걸인지...,

핵과 미사일 폐기는 불가역적이지만, 상호신뢰가 없는 상황에서의 신변보장 및 체제보장, 경제보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가역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트럼프처럼 밥먹듯이 약속을 깨는데 과연 누가 믿을까요? 이란 핵협정도 트럼프는 아무렇치도 않게 깨 버렸는데 말입니다.(* 핵포기한 리비아의 카다피, ‘북핵 문제’ 표현 잘못, ‘94년 제네바 합의서의 미국 위반 문제' - 리영희)

하여튼 이넘의 나라는 미국이 상전인지라..., 대통령부터 일반민중들까지 정신상태가 온존치 못하니...노예는 노예로 평생 살아야 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