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임용 심사내용은 비밀인가
외국어대 탈락자 3명 첫 정보공개 행정소송… 학교쪽은 “인사자료 비공개가 관례”
(참조: 대학 인사자료에 대한 미국 판례)
‘공공연한 비밀’. 이 부조리한 단어의 조합이 잘 어울리는 곳 가운데 하나는 교수임용 문제를 둘러싼 대학사회다.
심사과정의 불공정성 시비에 대한 잡음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경우는 거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불공정 심사의 피해 당사자거나 잠재적 피해자인 대학원생 자신들의 미래가 대학에 저당잡혀 있고,
구체적인 심사내용(참조 : 아래)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문별 내용심사 납득 못하겠다”
사진/ 지난해 말 선발된 첫 전임교수 심사결과를 놓고 불공정성 시비에 대한 논란에 휘말린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이용호 기자)
지난 5월13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노과 전임교수직 임용탈락자 3명은 심사기준 및 결과에 대한 정보 공개를
청구하는 소장을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했다. 교수임용 탈락자가 채점결과의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기는 유례없는
일이다. 소송 당사자인 성종환(43), 전혜진(38), 최문정(35)씨는 통역번역대학원의 선후배 관계로 이미 수년 동안
겸임교수와 BK21계약교수, 강사직으로 이곳에 몸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말 같은 대학원 출신으로 이번에 교수직에 임용된 방아무개씨와 함께 한노과에서 처음으로 선발하는
전임교수직 임용심사에 지원서류를 제출했다. 대학은 이들 지원자 4명을 대상으로 연구실적, 통역번역실적, 강의경력 등에
대한 기초심사와 대표논문 외부심사, 그리고 공개강의 등 총 3단계의 심사과정을 거쳤다.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은 학부의
노어과 교수 4명과 통역번역대학원의 교학부장(한일과 교수)이 맡았다. 심사를 통해 방씨가 최종 임용자로 결정됐고, 지난
12월 말 방씨는 인사위원회의 면접과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한노과의 전임교수로 최종 결정됐다.
기초심사와 공개강의뿐 아니라 대표논문 외부심사까지 거친 점을 감안하면 심사절차에서 공정성은 엄정하게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올 2월15일 대학 총장과 통역번역대학원장, 그리고 심사위원장에게 심사기준 및 결과의 공개와
재심을 청구했다. 각 부문별 내용심사에서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첫째 근거로 임용자의
연구실적, 통번역실적, 강의경력 등이 3명의 지원자보다 적다는 점을 들었다.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경력 기준이 되는
학기 수를 비교했을 때 임용자의 경력은 지원 당시 5학기로 성종환(13학기), 전혜진(13학기)보다 적고, 연구실적을 입증하는
논문 수와 중요도에 따른 환산점수(전국·일반·교내 등 어떤 학술지에 실리느냐에 따라 배점기준이 다름)에서 역시
다른 지원자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들이 문제삼는 것은 통번역실적 평가다. 이들은 돌려받은 제출서류에 체크된 평가 표시에서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성종환씨는 “통역실적은 ‘건수’가 아닌 ‘일수’로 계산하는 것이 원칙인데 건수 별로 일괄번호를 매긴 건
일수 계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문정씨는 “인증받은 통역 일수 전체를
통계내야 함에도 어떤 부분에는 체크가 된 반면 어떤 부분은 아예 펼친 흔적조차 없어 과연 서류 전체를 검토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했다. 또한 임용자가 제출한 러시아 문학 관련 번역 비디오 테이프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심사위원들의
설명에 대해 “산업경제·과학기술·정치법률 번역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통역번역대학원 커리큘럼의 취지와도 배치된다”
고 말했다. 최씨는 제출된 비디오 테이프의 공동번역자기도 하다.
교육부도 “자료 청구할 수 있다”
사진/ 심사에서 탈락한 세명의 지원자들은 교수임용 지원자로는 처음으로 임용 심사기준 및
결과 정보공개를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박승화 기자)
공개강의에 대해서도 이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공개강의는 서류심사와 다르게 심사위원의 자율성과 각기 다른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에 절대적인 평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시 참관했던 대학원생 상당수도 이들의 문제제기에
수긍한다. 공개강의에 참관했던 한 대학원생은 “누가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할 입장은 못 되지만 당시 임용자의 강의
자료준비가 다른 3명보다 철저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라며 “심사결과를 들었을 때 동료들 대부분이 매우 의아해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은 2월부터 4월 초까지 5차에 걸쳐 대학에 심사결과 관련정보 공개 및 재심을 청구했다. 또한 2차에 걸쳐
교육인적자원부에 감사를 청구했다. 심사결과를 요청한 배경에는 올 1월1일부터 시행된
교육공무원임용령 개정령 제4조 제6항이 있다. 이에 따르면 “대학 교원의 신규채용에 지원한 자가 신규채용에 관한 심사기준 및 지원자별 심사결과 등에 관한 공개를 요구하는 때는 신규채용되는 자가 확정된 후에 이를 공개”해야 한다. 학교와 교육부는 “임용령 개정령은 2002년 1월1일 이후 임용이 이뤄진 경우에 한해 심사서류를 공개하기로 돼 있는 데 반해 한노과 교수 신규임용은 2002년 1월1일 이전에 결정됐으므로 심사자료 공개의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2차 회신에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8조 규정에 따라 학교 쪽에 심사 관련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개정된 임용령 적용에 대한 이들 3명의 해석은 다르다. 강의가 시작되는 2002년 3월부로 임용이 확정됐기 때문에 이번 한노과 신규채용에도 임용령을 적용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지난 4월2일 대학당국으로부터 비공개 결정 및 “민원인의 지속적인 이의제기는 임용자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뿐 아니라 학교의 정상적인 학사행정에 부당 간섭하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추후 이러한 해교 행위를 계속할 경우 학교는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필요한 행정적 조처를 취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들이 낸 행정소송에 대한 학교 쪽 대응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심사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재영 통역번역대학원장은 “심사위원 가운데 1명이라도 이의제기를 했다면 공정성 문제가 일어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못박으며 “탈락자들이 문제를 발견했다면 결과 직후 제기할 일이지 이사회 승인까지 난 한참 뒤에야 한 것은 너무 늦었다”고 덧붙였다. 표상용 심사위원장은 “제한된 시간에 방대한 서류내용을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실적 한두개를 빠뜨릴 수는 있지만, 심사결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결정적인 착오나 실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지난 4월22일 고려대 노문과 고일 교수를 비롯한 12명의 동문교수들이 학교에 제출한 공개 요구서에는 “임용심사에서 탈락한 이들이 보내온 문건들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점이 많은 데 비해 최근에 이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학교 쪽에서) 답변한 글은 불행히도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적혀 있어 탈락자들의 문제제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있는 그대로 열어보이는 게 두렵나
정보 비공개에 대한 대학 당국의 입장도 완강하다. 정일용 교무처장(무역학과)은 “심사에 잘못이 있어서 공개 안 하는 게 아니라 통상적으로 인사에 대한 자료는 공개하지 않는 게 관례”라면서 “모든 걸 공개했을 경우 개인적인 감정으로 스승에게 의구심을 품으면서 사제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공개하더라도 어떤 기준 내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믿었던 스승에게서 박한 점수를 받는다면 기분 좋을 제자는 없다. 그러나 교수임용 심사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담보된다면 개인적인 섭섭함 때문에 그 결과를 수긍하지 않거나 학교를 환멸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한 대학원생은 “동기들 사이에 순진하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뭐하냐는 자조감이 팽배해 있다”고 전한다. 소송을 제기한 전혜진씨는 “우리 중 누구도 심사결과가 뒤바뀌어 3명 가운데 1명이 새롭게 임용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면서 “스승에 대한 신뢰를 법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이번 행정소송의 판결은 앞으로 대학의 교수임용 심사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이, 그리고 임용문제의 잡음을 겪고 있는 적지 않은 학교가 임용과정에 대한 의혹과 불신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심사기준과 결과에 대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열어보이는 것이다.
이는 대학사회가 도제관계가 아닌 진정한 사제관계로 복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열쇠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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