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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순원 장로:9/교수- 대법관 -변호사(역경의 열매)
1997-06-19 - 원본링크
◎「위헌」판결로 박정권 미움사 재임용 탈락/사병사망 [국가배상법] 위헌시비/공화당정권 편법 동원 방해/대법승리… 예측대로 보복당해
너무 「원칙적인」 법관생활을 해서일까.이른바 국가배상사건 논쟁에서 정권의 의도와 어긋난 결론을 고집하다 재임명에서 탈락하고 만 것이다.
68년 4월 육군 모부대 소속 운전병의 부주의로 인해 동료사병이 사망함으로써 [국가배상법] 위헌시비가 촉발됐다.「다만 군인이 전투훈련 및 직무수행중 전사 순직 공상으로 유족연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는 국배법 단서규정에 근거,국가가 대법원에 상고함으로써 이 조항의 위헌시비가 겉잡을 수 없이 불거졌다.
국배법의 위헌여부가 걸려있는 만큼 나를 포함한 대법원 판사 16명 전원이 이 조항을 심리하기 위해 전원합의체를 구성했다.나는 법을 공부하고 재판하는 사람으로서 유독
군인의 희생으로 국고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수긍할 수 없었다(* 박정희 스위스 계좌).당시 공화당정권은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막기위해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는 등 편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71년 6월 2년여 동안 논란을 벌여온 국배사건과 합의정족수 문제는 마침내 대법원판사 16명의 표결에 붙여져 나를 포함한 9명이 위헌판결을 내렸다.이는 미국의 「마베리 대 메디슨」 사건과도 결줄 수 있는 사법부의 승리로 평가됐다.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은 결과적으로 우리 사법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위헌판결이 되고 말았다.유신헌법으로 바뀌면서 대법원의 위헌심사권은 헌법위원회로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71년 7월말 법조계 안팎에서는 정부가 곧 법원을 손볼 것이라는 상서롭지 못한 소문이 나돌았다.소문은 현실화돼 법원을 강타했다.이른바
사법파동의 시작이었다.현직 부장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신청과 기각,검찰의 2차청구,
전국법원판사들의 집단사표,고위층의 사건백지화 지시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 파동은 그해 가을 정국을 뒤흔들었다.
73년 3월 유신헌법에 따른 전국법관의 재임명 및 보직개편이 이뤄졌다.인사발표 수개월전부터 위헌판결을 내린 대법원판사 9명은 재임명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았다.결과는 예측대로였다.
재임명 탈락으로 나는 12년의 대법원판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40대의 장년이 60을 바라보는 초로로 변했다.폭주하는 재판업무에 골몰하고 시달리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짧게만 느껴졌다.정들고 낯익은 직원들과 작별하는 것이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이제부터는 입장만 바뀔뿐 재야법조인으로서 몸담아 일하던 법원의 여러 직원과 항상 접촉할 것을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에 일말의 위로가 됐다.어떻든 법관생활에서 해방돼 사회에 나오게 된 나는 흡사 새장에 갇혔던 새가 훨훨 창공을 나는 기분이었다.
재임명 대상에서 제외되자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이 나를 찾아왔다.
『이제 대법원에서 물러나면서 생계에 곤란받지는 않겠습니까? 퇴직 후 사법연수원장과 상의해 가능한한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연수원생을 지도하는 직책을 맡아줄 수 있겠습니까?』〈정리=권명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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