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판사님, 길들여진 판사님…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948년 대한민국 출발 때 3부 중 가장 깨끗하고 똑똑했던
사법부가 가장 처절하게 망가진 이유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최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활약이 눈부시다. 두 기관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수구적인 결정을 연달아 내놓아,
철없는 ‘좌경 정권’ 때문에 이 나라가 결딴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애국세력’에게 천군만마의 힘이 되어주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8월26일 국가보안법의 말 많고 탈 많은 고무찬양죄에 대해 재판관 9명의 전원 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같은 날 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하는 현행 병역법에 대해서도 7 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뒤질세라 대법원은 9월2일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겨냥해 “나라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가의 안보에는 한치의 허술함이나 안이한 판단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주류 중의 주류!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라는 자리에 오른 분들이 보수적이라는 점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로 새삼 놀랄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세속의 정치적 일에 초연한 척 지내온 점잖은 분들이 작심을 하고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입장에 서서 보면 이해할 만도 하다.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 자리가
넘어갔다. 1960년 4월부터 1년여 동안의 짧은 에피소드를 빼고는 대한민국 수립 이래 처음으로 정치권력이
바뀌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른바 ‘주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
5년만 참자.”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면서 5년은 흘러갔다.
△ 1971년 7월 사법 파동 당시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형사지법
판사들의 사표를 모아들고 있다. 사법부가 철저히 길들여지는 계기가
됐다.
|
|
그리고 2002년, 다시 대선의 계절은 왔다. 그런데 또 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책임져야 할 환란위기도,
이인제로 인한 적전분열도 없었고, 정몽준은 선거 전날 밤 노무현과 결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진 것이다. 김대중은 비주류 내에서는 그래도 주류였지만, 바보 노무현은 비주류 내에서도 비주류였다.
기득권층인 ‘주류’로서는 이런 노무현에게 져서 앞으로 5년을 더 보내야 한다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영원히 정권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탄핵이었다. 의회 다수의석의 힘을 빌려 잃어버린 대통령 자리를 되찾으려는 무모한
시도는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갖고 탄핵을 밀어붙인 거대야당이 거대여당의 출현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주류’는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마저 ‘비주류’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국가의 3부 중
주류에게는 이제 사법부 하나가 남은 셈이다. 대통령이 넘어가고, 입법부도 넘어가고, 종이신문의 영향력은 방송과
인터넷 매체에 치여 위축됐고, 게다가 사법부 내의 사정도 옛날 같지 않다. 사법개혁이니 뭐니 해가며 지난
수십년간 굳어져온 법관 서열 대신에 대법관 인사청문회를 하질 않나, 시민단체가 후보를 추천하거나 검증하겠다고
하질 않나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또 여태까지 아무 탈 없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1만명을 감옥에 보내왔는데
갑자기 하급심에서 무죄 판결이 떨어지지 않나,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이라며 국가보안법의 사활을 걸고
몰아붙인 송두율 교수가 핵심적인 부분에서 무죄를 받아 풀려나지를 않나, 주류권력의 마지막 보루가 된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나라 전체가 정말 위기 상황에 빠진 꼴이다.
<한겨레21>에서도 얼마 전 특집으로 다루었지만, 이제 모든 것은 헌법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니 바라는 대로 인권의 최후 보루가 될 것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주류’ 기득권층이 그래도 끝까지 장악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계속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젊은 법관들이 고뇌하며 내린 하급심의 전향적 판단을 모조리 퇴짜 놓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법부의 역사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이 출발할 때 그래도 3부 중에서 가장
깨끗했고 제 기능을 수행했던 사법부가 어쩌다 저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정치깡패가 판사를 협박하던 50년대
1950년대는 정치깡패의 시대였다. 1958년 7월2일 유병진 판사는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게 예상을 깨고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사흘 뒤 법원은 단체손님을 받았다.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고 부르짖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애국청년’ 수백명이 법원에 난입한 것이다.
경찰은 이런 때면 늘 어디 가서 딴 짓 하다가 한 시간쯤 흐른 뒤에 나타나는 법이다. 유병진 판사는 이에 앞서
4월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보에 ‘무산대중의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무시무시한 부제 아래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갈구한다’라는 치기 어린 글을 기고한 유근일- <조선일보>의 바로 그 유근일이다- 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6월23일에는 용산중학 교감으로 재직 중에 간첩 혐의로 기소된 이태순 피고 사건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때는 비록 김병로 대법원장은 퇴임한 직후였지만, 그가 일궈놓은 전통에 따라 많은 판사들이
법대로 판결하고 있었다. 5척 단구의 조그마한 보수주의자 김병로는 이승만 시대의 무지막지한 외풍으로부터 사법부를
지켜낸 든든한 거목이었다.
1960년대 전반에도 법원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권력의 주구들은 법원으로 몰려갔다. 한-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1964년 5월21일, 이번에는 정치깡패가 아니라 정복을 입은 군인들이었다. 법원이 박정희가
내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벌인 시위 주동학생들의 구속영장을 대부분 기각하자 수경사 소속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하고 심지어 판사의 집까지 찾아가 당장 구속영장을 발부하라며 행패를 부린 것이다.
자기를 천황쯤 되는 초월적 지위에 놓고 싶어했던 박정희는 3권분립을 원리로 삼는 민주주의을 경멸했고, 가끔
행정부를 견제하려 드는 사법부를 극도로 불신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1962년 5월14일
대법원장에게 보낸 ‘지시각서’ 5호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박정희는 “혁명 이래 일부 법관이 아직도 새로운
세계관의 확립 없이 돈과 술에 팔리고 정실과 야합”하고 있으며, 중대한 국가적·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땅을 치고 우는 약자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도 없이 마치 법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완전히 사단장이 밖에서 술 먹다가 사고치고 들어온 초임
법무관 야단치는 어조였다. 박정희에게 모든 국가기구는 통치권자가 세운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해야 하는 존재였지만,
사법부는 여기에 역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도 꿈꾸지 못한 사법기구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박정희 시대에는 가인 김병로나 권승렬, 최대교같이 늘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권력에 맞서 외풍을 막아줄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다.
|
△ 박정희 정권 시절 검찰총장에 임명돼 벼락출세한 신직수(왼쪽).
그와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법무장관
민복기(오른쪽).
|
1963년 12월7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
그의 학교나 고시 동기들은 대개 평검사였고 15년에서 2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검찰총장이 되었으니
벼락출세도 그런 벼락출세가 없었다. 오죽하면 심기가 불편한 고검장들이 집단으로 검찰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신직수가 벼락출세를 한 비결은 박정희가 5사단장 시절, 그가 사단 법무참모를 지낸 인연 때문이다.
육사 출신이 주도한 군사정권과 판검사들의 야합을 육법당(陸法黨)이라 불렀는데, 아마 신직수가 법당의 초대 당수쯤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검찰개혁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검찰이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를 하는 것이
봉건적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나 역시 이 비판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저 험한 군사독재 시절에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에 나름대로 상황에 따른 합리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자격 없는 권력자가 자격 없는 대상자를
검찰총장이나 다른 요직에 인재 발탁이란 미명하에 끌어올리는 것을 막으려면, 조직 전체가 똘똘 뭉쳐 “서열대로
합시다”라고 할 수밖에. 가끔 장관이나 고위직 인사를 보면 ‘왜 저런 사람을 저런 자리에 앉히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뜻밖에 큰 감투를 쓰게 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권력자 원하는 대로
진흙탕에서 뒹구는 일도 마다 않고 하는 것이지, 자기가 잘나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뭐 빚진 게
있다고 무리수를 두겠는가? 이런 게 박정희의 용인술이었다.
신직수는 무려 7년 반을 검찰총장 자리를 차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장수 총장이 되었는데, 그의 총장
시절 검찰은 완전히 독재권력의 충실한 시녀가 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64년 8월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인 6·3 사태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된 지 얼마 뒤 중앙정보부는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의 각본을
다 짜서 서울지검으로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 이하 검사들이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다며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법무장관 민복기는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공안부장 이용훈 등
3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다.
([한겨레] 살아있던 검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몹시 분개했고, 중정 차장으로서 그를 모셨던 신직수가
총장으로 있던 검찰은 이용훈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 사건을 거치면서 검찰은 1970년대를 풍미한 참고서의
이름마냥 박정희 체제에 ‘완전정복’되었다. 신직수는 이후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법살인으로 악명을 떨친 2차
인혁당 사건을 처리했다.
‘양심에 따른 기소거부’를 아십니까
조직을 장악할 때는 당근도 같이 주는 법. 법무장관 민복기, 검찰총장 신직수, 이 환상의 콤비는 대법원이
전체 법조계를 대표하기 위해서 대법원 판사에 검찰 출신도 들어가야 한다는 궤변을 내세워 마침내 대검차장 출신의
주운화 등이 검찰 대표로 대법원 판사가 되는 길을 연다(이런 이상한 관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예: 안창호, 안대희). 그런데
주운화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맡아서 역시 법대로 일부 피고의 간첩 혐의의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유병진 판사 때나 1964년 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 때처럼 직접 법원에 ‘애국청년’들이 몰려온
것은 아니고, 벽보를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거기 사용된 표현은 과거의 두 사건보다 훨씬 거칠었다. 담당 재판장
김치걸이나 주심 주운화 등은 ‘김일성의 앞잡이’로 ‘법관의 가면을 쓰고 도사린 붉은 늑대’이며 사법부는 ‘북괴의
복마전’으로 규탄됐다. 이 사건을 만들어낸 정보기관의 간부는 인책 사임했다는데, 사법부 보호를 위해서 공작
자체에 책임을 물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너무 졸렬해서 역효과 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하에서 사법부가 철저히 길들여진 계기는 역시 1971년 7월 말에 시작된 사법 파동이었다. 박정희는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 신승하고 7월에 3선 임기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 대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위헌심판권을 행사하여 군인과 군속의 손해배상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을 위헌이라 판결했다.(* 박정희 스위스 계좌) 그리고
학생시위로 구속되거나 반정부 논문을 기고했다가 반공법으로 기소된 문인들이 잇달아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에
박정희는 격노했다. 새로이 법무장관으로 승진한 신직수에게 사법부 길들이는 과업이 부여됐다.
판사들이 집단사표를 낼 정도였으니…
1971년 7월28일 서울지검 공안부(이때 공안부장은 1964년 인혁당 사건 때 공안부 검사로는 유일하게
사표를 쓰지 않은 최대현이었다)는 무죄 판결을 많이 낸 재판부의 하나인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이범렬 부장판사와
배석 최공웅 판사 등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 사실은 재판부에 할당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피고인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잘못이지만, 공식 출장비가 거의 책정되지 않는 현실에서 이는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다. 형사지법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증거를 보강하여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보강된
증거란 두 판사가 출장가서 ‘객고’(客苦)를 푼 것에 관한, 좀 쑥스러운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누가 보기에도 명백하게 법관 길들이기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보수적이고 집단 행동을 안
하기로 소문난 판사들도 집단 사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판사들은 이번 집단 사표가 단순히 동료를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법권 독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1) 반공법,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법관을 용공분자로 취급하여 협박하고 신원조사를 했다, 2) 판사실에 도청장치를 했다, 3)
무죄선고가 나면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듯 비난하면서 예금통장을 조사했다, 4) 판사들을 미행, 사찰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 등등 그동안의 사법권 침해 사례 7개항을 공개했다.
일선판사들의 집단 행동이 이어지자, 대법원 판사들은 회의를 열고 대법원장(인혁당 사건 당시 법무장관인
민복기가 대법원장이 되어 있었다)이 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대통령
‘알현’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결국 영장을 청구한 공안부 라인을 문책성 전보인사를 하는 것으로
법관쪽에 약간의 퇴로를 제공했고, 법관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사건 한달 만에 스스로 사표를 철회했다.
사법 파동이 일어난 1971년 여름은 유난히 큰 사건이 많았다. 파동이 한창 진행 중에 광주대단지 폭동,
남북이산가족찾기와 남북 적십자 회담 발표, 실미도 사건 등이 일어났고, 뒤이어 교련반대 데모로 위수령이 발동되고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사법 파동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 음모인 10월유신을 앞두고 걸림돌이 되는 각 집단을
각개격파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유신헌법이라는 황당한 헌법 아래 법관 재임용제도가 도입되어 대통령은 법관의
임명권마저 손에 넣었다.(* 유신체재 비판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에 이어 교수들 재갈 물리기 위한 교수 재임용제도 도입) 그리고 1973년 3월 법관 재임용에서는 전체 법관의 10%가 넘는 48명의 법관이
법복을 벗어야 했다. 1971년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에서 위헌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 9명을 포함해, 학생들을
무죄 방면하거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들도 대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전 대법관 방순원의 증언)
△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에게 신군부가 원한 내란목적살인죄
대신 단순살인이라는 소수의견을 제시한 대법원 판사 6명은 모두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
살아남은 판사들은 길들여져갔다. 이제 사법부(司法府)는 행정부의 한 부서인 사법부(司法部)라 불리더니
급기야는 사법부(死法部)라 조롱받게 되었다. 10·26 사건 김재규에게 신군부가 원한 내란목적살인죄 대신
단순살인이라는 소수 의견을 제시한 대법원 판사 6명은 모두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이영섭은 신군부의 외압에 마음고생을 하다 입이 돌아갈 정도였다. 그가
퇴임사에서 한 말, 자신의 대법원장 시절은 오욕과 회한의 역사였다는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형사지법
수석부장 시절 검찰의 영장청구를 기각하고, 사표를 쓴 판사들을 대표해서 성명서를 읽던 유태흥은 대법원 판사가 된
뒤에는 김재규 사형 판결에서 적극적 역할을 했고, 결국은 대법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유태흥은 법관 인사의
난맥상을 비판하는 글을 한 법조신문에 기고한 판사를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부임 하루 만에 울산지원으로
전보시켰다가 2차 사법 파동을 초래하고, 대법원장에 대한 사법 사상 최초의 탄핵 발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망가져간 사법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대법원에서 그나마 소수 의견을 가장 많이 낸
판사가 이회창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회창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
지난번 탄핵 사태 때 사람들은 혹시라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인용하면 어쩌냐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3월13일 광화문의 촛불시위를 다녀온 뒤 나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느긋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뭘
믿고 그러냐”며 설마 헌재 재판관들의 양심을 믿느냐고 힐난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다면서
‘그들의 양심은 나도 안 믿지만 거기까지 올라온 그들의 눈치만큼은 믿어줘도 된다’며 촛불이 꺼지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답해 같이 웃었다. 그런데 이제 헌재는 그 눈치를 벗어버리고- 어떤 재판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나를 놀라게 했는데, 정작 헌재 결정에서는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용감하게 수구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어떤 법원장은 자못 비장하게 시민단체의 개입으로 사법부의
독립이 훼손되고 있다는 퇴임사를 남겼다. 설마 군사독재 시절을 나름대로 고통스럽게 살아낸 저분들이 말하는
사법부의 독립이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니겠지?
•
한겨레21
제525호 표지이야기 “헌법은 ‘헌’법이 되고
있는가”
Copyright 2005 The Hankyoreh Plus inc. mail to 편집장,
Contact us
|
정치권과의 재판거래 사건 진행상황 일지
대법원의 재판감독 예 : 춘천지법<2010구합724> 사건의 중요사건 보고(종국시)
출처: 멋진생각
양승태 전 대법원장
1948년 1월 26일 경상남도 밀양출생으로 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제12회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고 사법연수원을 2기 수료했습니다.
이후 판사로 재직했으며,
2001년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장, 2003년 법원행정처 차장, 2005년 대법관, 2009년 2011년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2011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대법관, 제18대 대선 전자개표기 부정선거 공범
1955년 2월 7일 전라남도 광주출생으로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제21회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고 사업연수원 11기를 수료했습니다. 이후 판사로 재직했습니다.
1979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1991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2000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건설국 국장, 2005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10년 전주지방법원 법원장, 2011년 법원행정처 차장, 2012년 대법원 대법관, 2016년 법원행정처 처장
2016년 2월부터 2017년 5월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고영한 전 대법관은 통진당 재판에 개입하고,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등을 와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2016년 부산 법조비리 사건 때 윤인태 당시 부산고법원장에게 전화해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대로 변론 재개를 요청하는 등 재판에 개입하고, 최유정 전과로비 사건 때 일선 법원에서 검찰 수사기록을 빼낸 혐의도 있습니다. 대법원의 위상을 유지하려고 헙법재판소 내부 정보를 수집하면서 박한철 당시 헌재 소장을 비난하는 내용의 언론사 기사를 대필하게 지시한 혐의도 있씁니다. 박병대 전 대법관에 이어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계속 관리.실행한 혐의도 있습니다.
차한성 전 대법관
1955년 11월 26일 경상북고 고령군 출생으로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판사로 재직했으며,
1980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88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94년 사법연수원 교수, 1999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2000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06년 8월 ~ 2008년 3월 법원행정처 차장, 2008년 대법관, 2011년 10월 ~ 2014년 2월 법원행정처 처장, 2014년 영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2015년 재단법인 동청 이사장
박병대 전 대법관, 제18대 대선 전자개표기 부정선거 공범
1957년 9월 5일 경상북도 영주출생으로 환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코넬 대학교 로스쿨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79년 제21회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고 사법연수원 12기를 수료했습니다.
이후 판사로 재직했으며,
2011년 대전지방법원 법원장, 2011년 대법관, 2014년 법원행정처 처장, 2017년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박병대 전 대법관은 2014년 2월부터 2016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내면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민사소송,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
원세훈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판결,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 소송 등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2014년 10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공관에서 열린 '2차 회동'에 참석해 청와대, 외교부 등과 강제징요소송 처리 방향을 논의한 것이 대표적 입니다. '최고 사법기관'이라는 대법원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재판소 내부정보를 수집하고 일선 법원의 위헌제청 결정을 취소한 혐의도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의료진'인 박채윤씨의 특허소송 정보를 청와대에 건네준 혐의, 2016년 부산 법조비리를 은폐한 혐의, 각급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를 불법 편성해 집행한 혐의도 있습니다. 당시 법원행정처의 방향에 비판적이던 판사들에게 인사 등에서 불이익을 준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간여한 혐의도 있습니다.
임종헌 법원행정처 전 차장
1959년 3월 19일 서울출생으로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87년이후 판사로 재직했으며,
2012년 법원행정처 기회조정실 실장
,
2015년 법원행정처 차장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임종헌 컴퓨터에서 삭제되거나 암호가 걸려 있는 문건들을 풀기 위한다는 거짓핑계로, '알아서 증거인멸하라'며 임종헌의 친형이 원장으로 있는 '고려대 디지털 포렌식 센터'에 맡겼다.('[단독] 대법 특조단, '문건 복원' 임종헌 형의 기관에 맡겨', KBS, 2018.6.4)
2005년 12.23일 기획조정심의관 시절, 뺀질이 이상훈 문제로 임종헌과의 면담
이동원 대법관
1963년 충청남도 논산출생으로 경복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합니다.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 합격을 하고 사법연수원 17기를 수료합니다. 군법무관을 마치고 이후 판사로 재직합니다.
1991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
1995년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판사
,
2001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
2001년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
,
2018년 제주지방법원 법원장,
2018년 대법원 대법관
석궁사건 증거조작범,
노정희 대법관
1963년 전라남도 광주출생으로 광주동신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업연수원 19기를 수료합니다.
2004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2005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2009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2012년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
2013년 서울가정법원 판사
2015년 광주고등법원 판사
2017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18년 대법원 대법관
이인복 전 대법관, 전 선관위원장
1956년 충청남도 논산출생으로 대전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
1984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96년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부장판사
1998년 사법연수원 교수, 2001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2003년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2005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10년 2월~8월 춘천지방법원 법원장, 2010년 9월~2016년 9월 대법원 대법관
2013년 3월~2016년 9월 제1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국헌문란([형법] 제91조)의 재판거래 사실 및 수사 일지(시간대별)
2013년 12월 1일: 삼청동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에서 김기춘 전 비서실장, 윤병세 당시 외교부장관,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모여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지연시키는 논의를 합니다.
2015년 7월: 임종헌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실장은 청와대에서 우병우를 만납니다. 그 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오찬 회동도 있었고, 그 다음날 임종헌은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승진합니다.
2016년 3월: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은 김연학 인사총괄심의관에게 지시해, 인사자료를 활용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을 분석합니다.
2016년 4월: 임종헌은 김현보 윤리감사관에게 차성안 판사의 재산관계 검토를 지시했고, 윤리감사관실은 '차성안 판사 재산관계 특이사항 검토'보고서를 만들어 임종헌에게 보고합니다.
2017년 2월 20일: 새벽, 법원행정처에서는 문건 24,500개를 1 시간에 걸쳐 삭제합니다.
2017년 10월 31일: 양승태가 쓰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복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폐기됩니다. 하지만 검찰이 확보한 임종헌의 USB에서는 박병대 전 처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 각종 재판거래의 문건이 쏟아져 나옵니다.
2018년 6월 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노상 기자회견장에서 사법농단의 혐의를 전면 부인합니다.
2018년 10월 15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했습니다.
2018년 10월 23일: 더불어민주당, 사법농단 사건 관여 판사들의 탄핵과 특별재판부 구성 추진을 공식적으로 주장했습니다.
2018년 10월 23일: 밤 검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2018년 10월 26일: 오후 4시 20분 서울중앙지법 임민성 영장전담 부장판사,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송 영장 심사를 완료했습니다.
2018년 10월 27일: 새벽 2시 3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2018년 10월 29일: 재판거래 혐의를 받고 있는 서울고법 부장판사 김시철은 대법원 내부 통신망에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에 관해 법원 가족들께 드리는 글'을 올리며 검찰 수사의 위법성을 지적했습니다.
2018년 11월 4일: 검찰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묵비권으로 구속 기간을 15일까지 연장했다.
2018년 11월 6일: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의회'는 현직 법관 6명의 탄핵소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탄핵소추 대상 현직 법관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자체조사와 검찰 수사를 통해 사법행정권 남용과 재판거래 범죄가 불거진 법관들:
1. 권순일 대법관 (59. 사법연수원 14기)
2. 이민걸 서울고법 부장판사 (57. 사법연수원 17기)
3. 이규진 서울고법 부장판사 (56. 사법연수원 18기)
4. 정다주 울산지법 부장판사 (42. 사법연수원 31기)
5. 박상언 창원지법 부장판사 (41. 사법연수원 32기)
6. 김민수 마산지원 부장판사 (42. 사법연수원 32기)
2018년 11월 7일: 검찰, 차한성(64) 전 대법관 불러서 조사했습니다.
2018년 11월 9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소속 500명,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사법부 신뢰 회복을 위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18년 11월 9일: 검찰, 민영일 전 대법관을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관련해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습니다. 그는 2015년 7월 국정원 댓글 사건 상고심의 주심이었습니다. 2심에서 유죄로 인정된 결과를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 법원행정처의 외압 또는 지시가 있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2018년 11월 14일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11월 14일 임 전 차장을 구속기소 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공소장에 담을 범죄사실을 선별하고 있다고 합니다. 검찰은 지난달 말 임 전 차장의 구속 영장에
1.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2. 직무유기
3. 공무상비밀누설
4. 위계공무집행방해
5.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6.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 7~8개 죄명을 적었고 개별 범죄사실은 30개가 넘습니다.
2018년 11월 14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공소장은 A4용지 243쪽 분량이고 맨 뒤에 붙은 범죄일람표만 33쪽에 달합니다.
2018년 11월 19일: 박병대 전 대법관이 검찰에 소환 되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혐의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미뤘으며, 자신은 물론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법적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적극 방어에 나섰습니다.
2018년 11월 20일: 박병대 전 대법관, 검찰 재소환했습니다. 검찰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그가 공모한 사실이 30회 나온다고 했습니다.
1. 일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 2.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관련 행정소송 3.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 사건 형사재판,
4. 옛 통합진보당 국회,지방의회 의원들의 지위확인 소송재판
2018년 11월 22일: 법률 전문가 631명, '사법농단 법관 탄핵촉구 의견서' 국회에 전달
2018년 11월 23일: 고영한 전 대법관 검찰 소환 되었습니다. 피의자 신분으로 공개 소환되는 두 번째 전직 대법관입니다. 고 전 대법관은 양승태 사법부 시절인 2016년 2월부터 2017년 5월까지 법원행정처 처장을 지내며 각종 사법농단에 개입함.
2018년 12월 3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접수 했습니다.
2018년 12월 7일: 서울중앙지법 임민성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박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명재권 영장전담부장판사는 고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이 사건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철저한 상하 명령체계에 따른 범죄로서, 큰 권한을 행사한 상급자에게 더 큰 형사적책임을 묻는 것이 법이고 상식'이라며 '하급자인 임종석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상급자인 박.고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한 것은 재판의 독립을 훼손한 반헙법적 중범죄들의 전모를 규명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2018년 12월 7일: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양승태 사법농단'에 관여한 혐의로 수사를 받아온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전 법원행정처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모두 기각된 것은 국가 사법체계를 뒤흔든 재판거래, 법관사찰 등이 모두 차관급 법관 한 사람의 '단독범행'이었다는 상식과 정의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임 저 차장을 사법농단의 주범으로 상정하고, 상급자들에 대해선 공모 여부를 따지는 식으로 접근 한 것이며, 이 같은 논리구조대로라면 두 전 대법관보다 윗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책임을 묻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고 했습니다. 임 전 차장 선에서 '꼬리자르기'하고 전 대법원장, 대법관들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읽힌다고 했습니다. 실체적인 진실 규명은 외면한 채 조직 보호에만 기를 쓰는 '방탄 법원'은 더 이상 믿기 어렵다며, 특별법 제정을 통한 특별재판부 설치와 현직 법관 탄핵소추가 답이라고 하였습니다.
2018년 12월 10일: 오후2시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1회 공판준비기일에서는 1시간 넘게 검찰과 변호인단의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임 전 차장측은 검찰이 공소장에 범죄혐의와 무관한 내용을 다수 기재했다며 사건에 대해 심리를 할 필요도 없이 검찰의 공소를 기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검찰은 변호인단이 무리한 주장을 한다며 반박했습니다.
2018년 12월 11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일요일인 지난 9일 이인복 전 대법관을 비공개로 불러 조사했습니다. 이 전 대법관은 법원행정처의 통합진보당 잔여재산 가압류 사건 개입에 연루돼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 전 대법관은 현역 대법관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던 2014년 12월 윤성원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에게서 '통진당 예금계좌에 대한 채권가압류 신청사건에 대한 검토' 문건을 받아 이를 선관위 법제국 해석과장인 박세진 변호사에게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린 뒤, 각급 선거관리위원회가 법원행정처 의도대로 통진당 잔여 재산에 대해 가처분을 신청하자, 각극 법원은 이 신청을 모두 인용했습니다. 법원행정처의 직권남용 혐의에서 이 전 대법관이 '중간다리'역할을 한 것입니다.
2018년 12월 18일: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는 '양승태 사법농단'에 연루돼 징계 청구됐던 법관 13명 중 3명은 정직, 4명은 감봉처분 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규진, 이민걸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각각 정직 6개월, 방창현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정직3개월 처분을 내렸고, 박상언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와 정다주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는 감봉 5개월, 김민수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부장판사는 감봉4개월, 시진국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부장판사는 감봉3개월로 처분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이규진 부장판사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원 행정소송과 관련해 재판부의 심증을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는데 관여하였고, 이민걸 부장판사는 더불어민주당 유동수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과 관련한 문건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방창현 부장판사는 이 부장판사에게 심증을 알려주고 선고 연기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박상언, 정다주, 김민수, 시진국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에 심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지시에 따라 재판 거래 및 법관 사찰 문건을 작성한 혐의로 감봉처분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징계결정에 대해 사회 각계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2019년 1월 4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1월 11일 오전 9시 30분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피의자로 불러 조사한다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범죄 혐의가 방대한 데다 피의자에 대한 야간 조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점 등을 고려해 양 전 대법원장을 두 차례 이상 불러 조사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019년 1월 7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고영한 전 대법관을 피의자 신분으로 비공개 소환 조사했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 소환 조사를 앞두고 전,현직 대법관 등을 조사하는 등 양 전 법원장 조사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2019년 1월 11일: 오전 9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석 전 서초동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참담한 마음이다, 자신의 부덕의 소치다, 법관을 믿어달라, 과오가 있다면 제가 책임지겠다. 조사 과정에서 기억나는 대로 가감없이 답변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해서는 취재진 질문에 아무 말 없이 포토라인도 패싱하고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2019년 1월 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했습니다. 전직 대법원장이 검찰 조사를 받는 것은 헌정 사상 처음입니다. 수사 착수 7개월 만에 이뤄진 소환입니다.
'사법농단'의 단초가 드러나고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나오기까지는 1년 11개월이 걸렸습니다. 2017년 2월말 당시 법원행정처 기회조정실 기획제2심의관으로 발령받은 이탄희 판사가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서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를 저지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표를 낸 게 시발점이었습니다. 법관 독립 침해 논란 뒤 양 전 대법원장 지시로 설치된 진상조사위원회는 두루뭉실한 결론으로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시민의 분노가 폭발하고 시민사회는 법관탄핵과 특별재판부 설치를 촉구했습니다.
2019년 1월 11일: 밤 11시 55분, 양 전 대법원장은 14시간 넘는 검찰 조사를 받고 귀가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나온 양 전 대법원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곧바로 귀가 차량으로 올랐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조사 시작 11시간이 지난 오후 8시40분쯤 피의자 신문을 마친 뒤 3시간 가량 신문 조서에 담긴 자신의 진술을 검토했습니다.
2019년 1월 14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오전 9시 30분에 양 전 대법원장을 비공개로 소환해 두 번째 조사를 했습니다. 검찰은 보안상의 이유로 두 번째 조사부터는 비공개로 소환 했습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강제징용 재판 개입, 판사 인사 불이익과 관련된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 통합진보당 재판 개입,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과정에서의 헌법재판소 내부 동향 수집 등을 집중 추궁했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직원들이 알아서 한 것"이라고 말하며 대부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9년 1월 15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오전 9시 20분 부터 양 전 대법원장을 비공개로 소환해 세 번째 조사를 했습니다.
2019년 1월 18일: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직무유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업무상비밀누설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습니다.
2019년 1월 24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됐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3일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진행한 뒤 24일 오전 2시쯤 "범죄사실 중 상당부분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며, 현재까지의 수사진행 경과와 피의자의 지위 및 중요 관련자들과의 관계 등에 비추어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헌정 사상 최초로 범죄 혐의를 받아 구속 수감된 대법원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법농단 수사로 구속된 피의자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이어 2명으로 늘었습니다.
2019년 1월 25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오전 양 전 대법원장을 불러 조사를 했습니다. 검찰은 10일간 구속 상태에서 조사하고 필요할 경우 법원의 허가를 받아 구속기간을 10일 연장할 수 있습니다. 검찰은 구속기간 만료 전까지 추가 조사를 마무리한 뒤 양 전 대법원장을 재판에 넘길 것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