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로 흥행 과녁 꽂은 정지영 감독
30년 만에 홀로 일어선 영화 인생의 성취 비화
김두호 승인 2012.06.13
【인터뷰365 김두호】영화시장에서 대박 흥행은 시추공(試錐孔)으로 유전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10개의 구멍을 뚫어야 한 개의 유징이 나오는 정도인 성공률 10% 쯤 된다. 과거 <남부군> <하얀전쟁>으로 이름을 남긴 영화감독 정지영이 5억짜리 저예산 영화 <부러진 화살>로 100억을 투자해도 성취하기 어려운 관객 350만 명을 기록해 2012년 벽두 영화인 최고의 성공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영화감독을 비롯한 중년 이후의 영화인들이 대다수 창작의욕을 잃고 영화제작 일선에서 저만치 떨어져 못다 푼 꿈과 한을 달래며 산다는 점에서 더한층 돋보이고 눈이 부신다. 개봉과 함께 한동안 사회문제로 이슈화 된 <부러진 화살>은 자신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한 판사에게 분노를 느낀 해직 대학교수가 귀가하는 담당 판사에게 석궁을 쏜 죄로 장기간 수형생활을 한 실존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정 감독이 영화의 소재헌팅과 기획 작업에서 최소한의 제작 자본을 유치하는 일, 연출까지 1인 3역 5역을 하며 내놓은 영화였다. 그의 성공담 이면에는 작품을 연출하기 위한 악전고투의 비화도 있지만 그 후, 단지 한 작품으로 거액을 벌어들이면서 달라진 영화감독의 생각이나 신상의 변화도 어떤 것인지 묻고 싶었다. 1982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충무로에 입성해 만 30년을 맞이한 정지영 감독을 만나 그의 영화인생을 중간 결산했다. <부러진 화살>은 그의 13번째 연출 작품이다. 20억쯤 내 손에 들어온다 영화인들, 특히 영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중견 감독들에게 당신의 성공은 부러움도 사겠지만 한줄기 시원한 희망을 쏘아 올린 것처럼 통쾌감도 던져준 것 같다. 우리 영화계에는 많은 감독들이 너무 일찍 은퇴나 다름없이 작품 활동을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영화 제작과 배급망을 움직이는 몇 개의 메이저급 상업 자본이 영화산업을 좌지우지하면서 흘러간 감독들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 관객들이 알고 있고 인기가 있는 감독이나 연기자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씬 별로 채점해서 평가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아마추어인 그들은 우리처럼 나이 먹은 감독들 만나 얘기 나누는 걸 불편해 한다. 권력은 자기들이 쥐고 있는데 어른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게 당연히 싫지 않겠는가? 결국 기획이나 연출 감각 등에서 경쟁력 있는 신세대 젊은 감독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 아닌가? 우선 제작 자본을 움직이는 실무선의 투지 및 제작 시스템이 젊은 만큼 자신들의 기획의도와 쉽게 소통하고 움직일 수 있는 젊은 감독 쪽에 눈길을 두고 일을 추진한다. 주로 근래 한두 작품에서 관객들의 호응을 남긴 젊은 감독 중심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젊어서 잘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있고 이력이 붙은 사람이 잘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있는 법이다. 대한민국 영화계는 50대가 넘으면 거의 은퇴다. 비로소 완숙미를 발휘해야할 나이에 말이다. 옛날부터 상업 자본은 흥행에 실패한 감독과 냉혹하게 관계를 청산하고 새롭게 떠오른 흥행 감독 쪽에 눈을 돌리는 속성이 있다. 요즘은 영화 흥행의 필요한 요소를 어떻게 보는가? 좋은 시나리오를 확보하는 것과 좋은 연기자를 캐스팅하는 일, 그리고 감독의 연출 역량에 달려 있다는 것은 과거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투자 유치의 우선순위는 잘나가는 비싼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흥행영화의 우선순위에서 인기스타는 한참 후순위이다. 그들이 흥행몰이를 할 수 있는 것은 개봉초기 며칠뿐이다. 영화가 못받쳐 주면 관객은 급 감소한다. 투자자들도 이걸 알면서 시나리오나 감독이 좀 모자라도 스타가 캐스팅 된 작품에 무조건 투자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왠지 아는가? 간단하다.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지 않은가? 아마추어는 언제나 불안한 법이다. 저예산영화라면 비싼 배우는 엄두도 못내는 일인데 당신은 어떻게 안성기를 비롯한 거물급 연기자를 확보할 수 있었는가? 운이 따랐다. 운이라기보다 오히려 신뢰를 주고받는 오랜 인간관계와 좋은 시나리오를 확보한 덕분이다. 시나리오를 본 사람들이 누구나 주인공 석궁 교수에 안성기 씨를 적역으로 지목했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안성기 씨를 만나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그리고 사후 개런티로, 이를테면 무담보 신용 출연계약을 제안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읽고 흡족해 하며 나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흥행에 실패하면 갚을 수도 없는 거액의 출연료가 먼저 해결되면서 문성근, 이경영, 박원상 등 다른 출연자들의 캐스팅도 쉽게 풀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스타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꼽은 3대 요소 중 하나인 좋은 연기자들이다.
| 정 감독은 영화 <부러진 화살>의 흥행으로 20억 정도의 자본이 형성된 것을 “내 인생의 기적”이라 표현하고 있다. |
<부러진 화살>은 사회성 문제를 매우 리얼하고 흥미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완성도 면에서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흥행 영화로 기대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작품을 선택하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많은 저예산영화들이 제작을 끝내고도 극장을 잡지 못해 창고로 들어간 사례가 많다. 나는 한 6년간 중국의 혁명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리랑>을 준비했었고 이중섭 화백의 은박지 그림에서에서 따온 <은지화>라는 제목의 5.18 광주민주항쟁에 얽힌 이야기도 기획했었다. 모두 잘 안되던 중 이번 작품을 만났다. 어느 날 우연히 문성근 씨가 던져준 책을 읽게 되면서였다.
그게 <부러진 화살>의 원작이었군.
원작이랄 수는 없다. 책 <부러진 화살>은 소위 김명호 교수의 석궁사건과 그 재판을 추적한 기록이다. 그 책이 영화화를 촉발시킨 건 분명하지만 원작이랄 수는 없다. 어떤 사건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그 기사를 원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감옥에 있는 김명호 교수를 면회도 하고 편지도 주고받으며 캐랙터를 만들어 갔고 그의 파트너 박훈 변호사를 수없이 만나 조언을 얻어가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런데 과연 판사에게 석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가 감방으로 간 교수가 법정에서 판검사와 원색적으로 공방을 벌인 얘기를 영화로 옮겨도 탈이 없는 지를 변호사들에게 물었을 때 “위험하다” “개봉하기 쉽지 않다”는 우려를 표명하는 분도 있었다. 실제 투입된 순 제작비는 5억 정도라고 들었다. 350만 명이 관람했다면 도대체 얼마나 번건가? 마케팅 비용까지 포함하면 15억 원이 투입되었다. 50만 명이 손익 분기점인데 나머지 300만 명의 관람료를 총 수입금으로 볼 때 극장 몫과 세금 등 초기 지출 경비를 빼면 한 명당 3천 원 꼴로 총 90억 원의 계산이 나온다. 그 중에 투자자와 출연진, 스태프 등과 배분하고 나면 내 영화사(아우라 픽쳐스) 몫으로 약 20억 정도의 자본이 형성된 것이다. 내 일생에 이런 큰 자본이 생긴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후속 영화는 대공분실 <남영동>
이제 제작자로서의 여력이 생긴 건데 후속 작품도 준비 중인가?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수사기관의 대공분실이 있던 동네 이름을 그대로 옮긴 <남영동>(가제 假題)이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고 김근태 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가? 그렇다. 하지만 가명을 썼다. 군사독재시절 고문은 세 군데에서 경쟁적으로 자행되었다. 경찰이 담당하는 남영동의 대공분실, 군이 담당하는 서빙고, 중앙정보부가 담당하는 남산. 이 세군 데에서 수난당한 수많은 고문 피해자들을 대표해서 고 김근태님을 그리는 작업이어야한다고 생각되어서 가명을 쓴 것이다. 그래서 정말 많은 피해자들과 사건을 취재했다.
‘대공분실 이야기’라면 고문기술자도 주요 배역 인물로 떠오른다. 물론이다. <부러진 화살>에서 변호사 역의 박원상 씨가 피해자로, 이경영 씨가 고문 기술자로 출연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 가족 얘기가 나온다. 작품의 패턴이나 작의(作意)는 <부러진 화살>과 통하는 것 같다. 시나리오는 직접 쓰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공동작업을 한다. 이번엔 이대일과 강민희라는 신진 작가와 조감독 정상협이 함께 참여했다. 당신이 연출한 작품을 체크해보니 <부러진 화살>까지 13작품이었다.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를 시작으로 <추억의 빛> <거리의 악사> <위기의 여자> <산배암> <여자가 숨는 숲>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남부군>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 <블랙잭>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가운데 도쿄국제영화제나 대종상 등 국내외영화제에서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았거나 관객들의 주목을 받은 작품들은 대부분 사회적 통념을 깨뜨린 관점에서 그 시대의 사회적 이슈를 부각한 연출 작품이 많다. 영화작가로서 당신이 추구해온 창작 의식과 영화작가로서 사상적 성향을 밝혀달라. 영화는 내 삶의 토양이다. 나는 정치적이지도 않고 애써 이념적인 문제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나의 영화 작업은 ‘왜 그럴까?’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사회적 통념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려 있는 피해자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들의 고뇌를 찾아 가는 것 같다. 그러한 창작 여정(旅程)은 물론 도전과 노력을 요구한다. 정리해보면 영화적 발상이 일종의 호기심에서 시작된다고나 할까? | 영화 <남부군> 촬영 현장에서 정 감독과 배우 안성기 |
1990년 작품 <남부군>을 정 감독이 영화로 옮기려할 때 어떻게 만들어질까 영화평론가의 한사람으로 몹시 궁금했다. 문제의식을 안고 가는 작품이어서 솔직히 불안감도 버릴 수 없었다. 극중 주인공이 빨치산이다. <남부군>은 그들의 이야기였다. 바로 그 불안감은 우리들에게 금기시되어있던 인물, 사건, 사실들을 어떻게 그려내려하나 하는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반공영화도 용공영화도 아닌 분단의 비극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 인간 사회를 큰 스케일로 바라보면서 영화를 생각하면 어떤 문제도 영화로 풀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나의 꾸준한 작가적 욕망이다. <남부군>은 사실 6.29선언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고 사회적 긴장이 완화된 것이 작품 선택에 도움이 됐다. <하얀전쟁>에서도 베트남전 참전의 불행을 통해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냈다. <남부군>의 흥행 결과에 힘입어 제작 규모가 큰 <하얀 전쟁>도 연출할 수 있었다. <부러진 화살>이 문성근씨가 책을 읽어보라고 주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하얀전쟁>은 안성기씨가 권한 작품이다. <남부군> 찍을 당시 안성기씨가 내게 <하얀전쟁> 읽어봤느냐고, 안 읽었으면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남부군> 촬영 다 끝낸 후 읽고는 바로 영화화 결심을 했다. 당신은 고향인 청주에서 청주고교를 거쳐 고려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충무로를 찾았지만 영화감독으로 첫 작품을 발표한 1982년을 기점으로 돌아보면 올해가 만 30주년이다. 긴 세월이다. 자신의 지난 영화인생이 어떤 것인지 회포를 듣고 싶다. 고등학교 때 이미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대학을 동국대 연극영화과로 갔다. 하지만 학교에서 영화를 찍지를 않는 거다. 당시 영화실습이란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학생들에게 주로 연극만 시켰다. 학교를 고려대 불문과로 옮겼다. 거기서 영화 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변인식 선배님등 영화계 고려대 선배들과 교류를 가졌다. 군 복무를 마치고 4학년이 되어 졸업 후의 길을 모색할 일이 있을 때 마침 유현목 감독님이 위원장으로 있던 감독협회가 감독 지망생을 공개 모집했다. 8명이 선발됐으나 나중에 감독으로 작품을 낸 사람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용균, 그리고 나와 차현재 감독까지 3명이다. 나는 이만희 감독 연출팀을 지망했으나 별세하시면서 김수용 감독님 연출팀에서 <내일은 진실> <황토> <가위 바위 보> 등의 조연출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서울극장과 합동영화사 기획실장으로 있던 이황림 감독의 주선으로 프랑스 추리소설을 우리 정서에 맞게 각색 번안한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를 연출했다. 첫 작품을 찍을 때 절반쯤 찍고 포기할 뻔했다. 준비한 콘티가 현장에 적용되지가 않아서이다. 실험영화 한번 찍어보지 않고 감독을 하려 덤벼든 게 얼마나 무모한가를 크게 깨달았지만 이미 영화는 찍혀 가고 있었다. 어차피 영화는 최종적으로 감독의 것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덤벼 내 길을 만들어 나갔다. 돌이켜 보니 나의 30년 영화인생도 영화처럼 드라마틱 했다. 생활의 굴곡, 일의 굴곡, 보람도 있었지만 좌절도 많았다. 한때 당신은 박철수 등 몇몇 감독과 함께 느닷없이 방송사로 들어가 TV <베스트셀러극장> 등을 통해 영화 연출 형식의 TV 드라마를 연출해 많은 화제를 모았다. 그 시절 잠깐 충무로를 뛰쳐나간 얘기를 하고 넘어가자. 내가 만든 영화가 개봉관에 걸리지 않아 전전긍긍할 때 방송사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 것이다. MBC에 들어가 TV 베스트셀러극장 <완장> <춤추는 맨발> 등을 열심히 만들었다. 방송국에서 나와 고은 선생님원작 <산산이 부서진 이름> 영화화를 추진했는데, 비구니들의 반발로 임권택 감독님의 <비구니>라는 영화가 기획 취소되는 사건을 목격하면서 포기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는 결국 1992년도에 만들었다. 활동 전반기에는 주로 여성에 비중을 둔 멜로물들이 많았던 것 같다. 1987년 6월 항쟁의 정치적 사회적 격동의 시기에 기획된 <남부군>이 나의 연출 성향에 변화를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안정효 원작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제목에 반해 급하게 전화로 작가의 승낙을 받아냈다. | 영화 <부러진 화살>의 현장에서 변호사 역을 맡은 배우 박원상과 얘기중인 정 감독 |
김명호 교수는 순박한 사람 정 감독은 지난 정부 때 간혹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정치에 뜻을 두거나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다. 글쎄..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을 맡은 일이 있고, 국무총리 정책자문위원도 했지만 정치활동으로 생각지 않는다. 영화진흥법 개정운동이나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어떤 점에서 보면 나의 직업 활동이다. 그것을 두고 운동권 감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성근 씨와 특별히 끈끈한 인간관계를 나누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문성근, 이창동 감독 등은 스크린쿼터 지킴이 활동을 함께 하며 고락을 나누어 온 사이다. 또 세 사람은 일산의 한동네에서 살아 허물없이 지내왔다.
<부러진 화살>을 연출하면서 만난 실존 주인공 김명호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는 실제 어떤 분인가? 과장 없이 소개해 달라. 때 묻지 않은 순박한 분이다. 사회가 그를 화나게 해 자기 방어와 자기 나름으로 법의 정의를 위해 집요하게 싸운 분이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겪어보면 욕심이 없는 아주 소년 같은 분이다. 그를 투사로 만든 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살지 말고 대세냐 아니냐를 따지며 사는 게 맞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그는 그 통념이 이해가 안 되는 무균질의 사람이다. 학자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훌륭한 학자 한 사람을 손해보고 있다.
당신은 참 다양한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해 왔다. 그 중의 하나가 대학교수로서의 면모다. 순천향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만들어 부교수로 3년간 재직했고, 서울예술종합학교 초대 학장, 금년 3월 정년퇴임하기 전까지 지난 3년간은 모교인 고려대 전문교수로 방송 영화, 드라마 제작부문을 강의해 왔다. 지난 30여년을 굴곡의 삶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평탄하고 보람 있는 삶이 아니었나? 엄격히 말해서 영화가 되건 안 되건 영화준비를 하는 동안 나 스스로는 언제나 행복했다. 하지만 내 가족들은 안정감이 없이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힘겨웠다. 영화감독은 성공과 실패가 언제 어떻게 발생할 지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야인 같은 것이기에 자신의 가족들부터 언제나 이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생각한다.
당신의 영화사 아우라 픽쳐스에서 기획과 홍보를 맡고 있는 아들 상민 군이 아주 잘 생겨 화제더라. 이번 영화 홍보활동에서 영화기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아들도 영화감독을 시킬 건가? 지금 데뷔할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또한 프로듀서로서의 일도 익히고 있다.
<부러진 화살>로 황금 줄을 잡은 정지영 감독의 영화사 아우라 픽쳐스는 고양시 덕양구청 앞 빌딩의 큼직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무실 깊은 곳에 있는 주인의 방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설 때 정 감독은 책 한권을 내밀었다. <판사 니들이 뭔데?>라는 김명호 교수의 신간 저서였다.
왼손에 법전을 높이 치켜들었고 오른손에는 석궁을 움켜잡은 저자의 모습이 표지 그림이었다. 첫 장을 넘겼다. 저자는 표2 지면에 자신의 1인 시위 사진과 함께 ‘이 책을 펼쳐든 이에게’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법원이 판단했으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승복해야지, 법치주의 국가에서 판결에 불만이 있다고 판사에게 석궁을 들고 간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떠드냐?' 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책 덮고 가라.
1+1=3이라는 법원 판단도 승복해야한단 말인가?
'괘씸죄'라는 되지도 않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입시출제의 오류를 지적한 교수의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사들이 판치는 나라가 법치국가라고? 웃기는 소리 작작해라. 대한민국은 법치국가 아니다. 허구 헌 날 판사가 법을 위반하는 재판테러를 저지르고 있다는 현실 직시는 커녕 꿈에서조차 용납 못할 그런 인간들에게 뭔 말인들 먹혀 들어갈 것 같은가? 시간 낭비하지마라. 읽을 자격도 없으니까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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