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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 교수님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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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이용구 교수님께서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이용구 교수님은
경문대학 교수협의회를 창설하시고 회장으로 활동하셨으며 '전국전문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현 전교협)
회장, 교수노조 부위원장, 사교련 공동회장 등으로 활동하시면서 교수 권익을 위해 많은 일을 해오신
분으로 현재는 해직당하신 후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다음은 새해 인사말입니다.
이용구 교수님 이메일은
yklee9@korea.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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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그리고
사교련 교수님들께
보내 주시는 메일을 통해 회장님과
사교련의
활동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 기 사교련의 회장님과 같이하시는 교수님들의 활동은 한국에 있을 때 몇
년간의 저의 사교련
활동이 얼마나 제대로이지 않았었는지를 극명하게 대비해 말해 주는 것 같아 저를 다소
후회스럽게 만드는군요.
치사한 꼴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미련을 아주 떨쳐 버리려
그리고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하려 미국으로 왔으나 일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것도 의도한 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결말을 보지 못하고 떠나 온 재판은 그간
모두 패소 또는 기각되었는데, 전 교육부 차관급 교육부 관료
모영기가(현재 관동대 교수,
한국대학신문, 참조)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은 형사사건에서 벌금 200만원으로, 민사소송은 2인피고 공동으로 벌금 1000만원으로 확정되고,
새벽
6시에 일어나 나가 밤 9시가 넘어서야 들어오는 동안 아주 열심히 미국사람들 빨래를 해 주고도 단순히
밥벌어 먹는 것 조차가 힘든 실정입니다. 땀이 범벅되어 바지를 다리면서도 한국에서의 시절이 그리워
깊게 내쉬는 한숨은 저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아픈지를 제 자신에게조차 다시 다시 일 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닥 희망으로 마음을 달래 주는 것이 고국에서의 소식,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입니다. 삶의 희망입니다. 이곳에서 힘이 되어드리지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만, 부디 열심히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가 돌아가는 그 때에 꼭 다른
어려운 교수님들의 손발이 되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4년 1월 1일, 미국 테네시 주, 내쉬빌에서 이 용구
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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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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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2001년05월15일 제359호
꼬리에 꼬리 무는 비리
심 의원 뒤이어 경문대 인수한 전재욱씨…교비횡령으로 유죄판결 받았으나
사진/ 지난해 3월 민주당 안성지구당 정당연설회장에서 단상에 오른 심규섭 의원.
심규섭 의원이 비운 자리에는 전재욱씨가 들어섰다. 1981년 동우대학 설립을 시작으로 대학(교) 4개와 고등학교 3개를 운영하고 있는 전씨는 이른바 ‘학교재벌’이다. 99년 그가 인수한 뒤로 경문대는 몸살을 앓고 있다. 99년과 2000년 연이어 비리사학으로 국정감사에 상정될 정도다. 어느 교수는 그가 경문대를 인수한 뒤 생긴 변화에 허탈해한다.
“나 참…. 한때는 교수실 문을 뚫어놓았습니다. 99년 초부터는 경력과 호봉을 재조정한다면서 봉급을 20∼30%씩 깎았지요. 보너스 안 나오는 달에는 100만원 남짓 받는 교수가 있습니다.”
잠재해 있던 불만은 99년 6월 이용구 관광경영학과 교수가 검찰 등 평택의 각 기관에 진정서를 내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연이어 이 교수가 청와대, 교육부 등에 진정서를 내자 교육부는 경문대 감사에 들어갔다. 감사 결과 교비횡령 의혹이 드러났다. 침묵하던 학생들도 가세해, 99년 8월 비리재단 퇴진을 요구하며 본관 점거농성을 벌였다. 경문대 교수협의회도 이때 결성됐다.
교수, 학생들과 재단쪽 사이에 폭력사태까지 불거지자 교수협의회는 99년 8월13일 전재욱 전 학장과 김상호 당시 학장을 평택지청에 비리혐의로 고발했다. 고발당하고 얼마 되지 않은 99년 9월 전씨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뒤 그는 국감 증인으로 두 차례 채택되었음에도 신병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했다. 2000년 7월 마침내 전씨가 귀국했고 재판이 진행됐다. 결국 전씨는 지난 2월2일 열린 1심 판결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30억원을 선고받고 항소중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다른 학교의 교비 275억원을 횡령해 경문대의 빚을 갚는 데 사용한 탓이다. 경문대 교수협의회쪽은 “10여개가 넘는 비리혐의로 고발했지만 횡령 단 한 가지만 유죄판결을 받았다”며 재판결과에 불만을 나타낸다. 275억원 횡령 이외에 다른 건에 대해서는 항고마저 기각당하자 교수협의회는 지난 3월 헌법소원을 낸 상태다.
재판이 진행되던 지난해 6월, 이용구 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전 직장에서 일어난 문제가 탈락 사유였다. 그 뒤에도 재단을 상대로 한 싸움에 앞장섰던 이 전 교수는 지난 5월10일 아침 집에서 경찰서로 연행됐다. 전 교육부 관료 한명이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그는 영장 실질심사를 거쳐 그날 저녁 곧바로 구속 수감됐다. 이 사건을 맡은 김칠준 변호사는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 수사까지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귀국 뒤 비리혐의가 명백함에도 불구속 수사를 받았던 전재욱씨의 경우와 극단적으로 대조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난마처럼 얽혀드는 사학비리의 한 단면이다.
[ 특집 ] 2001년05월15일 제359호
세운다, 그리고 팔아먹는다
민주당 심규섭 의원의 화려한 사학비리 의혹… 뇌물 주고 부실한 대학 지어 등록금 횡령에 이중매매까지
사진/ 98년 8월 비리재단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경문대 학생들.
지난 5월3일 심규섭(민주당·안성) 의원은 수원지검 평택지청에서 소환조사를 받았다. 조사 내용은 평택공과대학(현 경문대학)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비리의혹에 관한 것이었다. 심 의원의 비리혐의는 등록금 12억원 횡령, 1천만원 뇌물공여, 학교 이중매매 의혹 등에 두루 걸쳐 있다. 아직 수사결과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현직 국회의원이 이런 의혹들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학의 초라한 몰골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동안 알려진 심 의원의 비리의혹을 되짚어보는 건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워야 하는 사학이 어쩌면 한낱 개인의 전유물로 전락한 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재산 양도가 아니라 운영권 양도?
심 의원 집안이 사립학교 재단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다. 안성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심 의원의 아버지가 안성여자상업고등학교(현 안성종합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경기도 교육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심 의원의 아버지는 안성여상에 이어 97년 평택공과대학을 설립했다. 심규섭 의원은 이 대학 이사장을 맡았다. 설립 인가 당시 교육부 평가자료는 교직원과 교육기본 시설 확보, 재정 요건 등에서 미흡한 점을 지적하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교육부 평가자료는 얼마나 믿어야 할까. 설립과정의 의혹은 오히려 심 의원 자신의 입을 통해 불거졌다. “3수를 한 거예요. 국회쪽을 뚫어라, 청와대에 로비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한 5억∼6억원 넘게 들어갔어요.” 99년 7월 방영된 서울방송 <8시뉴스> 인터뷰에 심 의원이 거침없이 털어놓은 로비내용이다.
일단 학교를 설립했지만 운영이 만만치 않았다. 97년 학교 문은 열고 신입생을 받았지만, 학교 건물 공사비를 지급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경문대의 한 교수는 “98년 당시 부도 위기설이 나돌았다”고 전한다. 결국 평택공과대를 설립한 ‘청송재단’은 재정난에 허덕이다 98년 9월 학교법인 ‘경복대학’에 학교를 넘기게 된다. 공사대금 미지급금 등 부채 100억원, 98년 2학기 교비 충당금 25억원, 현금 30억원을 합쳐 총 155억원에 대학 소유권을 양도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법인의 매매는 사립학교법에 저촉되는 일이다. 사립학교법은 학교법인을 공익재산으로 간주해 개인간 매매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99년 8월 이용구 교수 등 경문대 교수협의회쪽은 경복대 이사장 전재욱씨를 사립학교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당연히 학교를 넘긴 심 의원도 관련된 사안이었다. 하지만 수원지검 평택지청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심 의원과 전씨 사이에 이뤄진 매매를 학교법인의 기본재산 매매가 아니라 운영권 양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심 의원과 전씨가 맺은 ‘양도양수계약서’에는 평택공과대학의 교육용 재산 등 기본재산이 매매 대상으로 포함돼 있다.
심 의원의 또다른 비리혐의는 99년 전씨의 비리 혐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된다. 등록금 횡령과 뇌물공여 혐의가 바로 그것이다. 전씨의 비리를 추적하던 검찰은 경문대의 98년도 1학기 등록금 38억원과 2학기 등록금 20억원이 학교 회계비에 편성되지 않고, 임의로 지출된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재단 이사장이던 심 의원이 회계절차를 무시한 채 사용한 것이다. 결국 심 의원은 99년 11월18일 검찰 조사를 받게 된다. 이날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심 의원은 횡령 의혹이 있는 등록금 58억원을 공사비와 실습 기자재 구입 등에 썼다고 진술했다. 이중 12억원은 개인채무를 갚기 위해 썼다고 진술했다가 다시 이 돈마저 공사대금으로 들어갔다고 번복했다. 회계장부나 영수증 하나 없었지만 검찰은 횡령혐의에 대해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
뇌물공여 혐의에 대한 수사도 허술하긴 마찬가지였다. 심 의원은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정부 지원금 12억원을 빨리 받기 위해 98년 부친을 통해 교육부 김 국장에게 1천만원을 전달했다”고 뇌물공여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미 뇌물을 받은 죄로 직권면직된 김아무개 전 교육부 평생교육국장은 심 의원이 조사를 받기 사흘 전 해외로 도주한 터였다. 결국 뇌물공여 혐의는 수사진척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내사중지 처리됐고, 횡령혐의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다. 계좌추적만 하면 비리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중단된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정치인 봐주기 의혹’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이정회 검사(현 대전지검)는 “당시 심 의원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신분이었다”며 “전재욱 비리 사건만으로도 벅차 수사할 여력이 없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이재명 간사는 “당시 심 의원은 민주당의 전신인 새 정치국민회의 중앙당 상임위원이었다”며 의혹을 제기한다.
검찰의 ‘정치인 봐주기’ 아니냐
검찰 조사에도 불구하고 심 의원은 더욱 대담한 도박을 했다. 검찰 조사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9년 말, 심 의원은 대리인을 내세워 일간신문에 경문대 매매 광고를 냈다. 이미 소유권을 전재욱씨에게 넘긴 상황에서 이중매매를 시도한 것이었다. 마침 미8군 중앙회계처 부처장 김승준씨가 사겠다고 나섰다. 심 의원은 김씨에게 현금 60억원, 부채 67억원을 합쳐 127억원에 학교 소유권을 넘기는 약정서를 체결했다. 총선을 바로 앞둔 3월15일 이뤄진 이중매매였다. 심 의원은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22억원을 건네받았다. 이 돈과 2000년 2월 안성종고 교사 50여명을 맞보증 세워 대출받은 10억원은 총선자금으로 유용됐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김씨가 건넨 22억원도 ‘구린 돈’이었다는 것이다. 김씨가 미 육군성 예산에서 횡령한 돈으로 밝혀졌다. 사학을 개인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이들이 ‘깨끗한 손’을 갖길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인지도 모른다.
심 의원의 이중매매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회의원 당선 직후인 지난해 5월 초 또다시 재미동포 조아무개씨에게 127억원에 학교를 팔려 했다가, 조씨가 계약을 체결하기 전 심 의원에게 소유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계약 자체가 무산됐다. 지난해 8월 조씨는 심 의원을 사기혐의로 검찰에 고소·고발한 상태다. 수배를 피해 도망다니던 김승준씨도 지난해 8월 심 의원을 사기혐의로 고소했다. 구속되기 넉달 전이었다. 하지만 김씨의 고소건은 고소인이 몇 차례의 소환통보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검찰의 파일 속에서 잠자던 심 의원의 사학비리 의혹은 지난 3월 <내일신문> 등 언론이 다시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시민단체와 한나라당이 의혹 제기에 가세해 파문은 점점 더 확산돼 갔다. 여론에 밀린 검찰은 3월21일 재수사 방침을 밝혔고, 5월3일 심 의원에 대한 소환조사를 마쳤다. 평택지청 정병욱 지청장은 “계좌추적 등 모든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며 “이달 말까지는 수사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심규섭 의원쪽은 거듭된 취재 요청에 “검찰 수사에서 이미 모든 것을 밝혔다”고 되풀이할 뿐 끝내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이젠 검찰이 모든 것을 밝힐 차례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성역깨기 ] 2001년12월05일 제387호
최현우, 학교 자∼알 팔았다?
영주 역사상 최대의 시위를 부른 영주중앙고의 ‘뒤죽박죽 폐교이야기’
사진/ 영주중앙고(현 영주제일고/ 왼쪽 붉은색 건물)와 경북전문대 전경. 영주중앙고는 폐교됐지만 여전히 현암학원 소유로 남아 대학 부속건물로 쓰일 예정이다.
어느날 갑자기 인문계 사립고가 문을 닫는다. 꼭 문을 닫는다고만 볼 수도 없다. 인근의 공립 공업고가 때맞춰 인문고로 전환한다. 사립계 인문고를 다니던 학생들은 인문고로 전환한, 옛 공업고로 편입된다. 그렇다고 옛 공업고 교정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 그 학교 그 건물에서 그대로 수업을 받는다. 달라진 건 학교 이름과 주인일 뿐, 선생님들까지도 똑같다.
복잡하고 이상한 ‘폐교’다. 더욱 이상한 일은, 주인은 바뀌었는데 학교터와 건물 주인은 예전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새 학교는 옛 학교 주인한테 세들어 있는 셈이다. 이 뒤죽박죽 폐교 이야기는 지난해 한 지방 중소도시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기업의 폐업이나 인수·합병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학교 통폐합’이 이뤄진 것일까.
‘교육보국 의지’인가 ‘사학재벌 음모’인가
없어진 영주중앙고(경북 영주시 휴천동)는 지난 1975년 학교법인 현암학원이 설립했다. 이사장 최현우(74)씨는 이보다 앞서 72년 영주중앙고 바로 옆에 경북전문대를 설립했으며, 94년에는 4년제 동양대(경북 영주시 풍기읍)를 세운 전형적인 지방 ‘사학재벌’이다. 그는 대구와 경북 구미에도 각각 경북공업고와 경구중학교를 소유하고 있다. 그가 지난 2000년 10월4일 경북도교육청에 영주중앙고에 대한 ‘학교공립화 전환(통합) 인가 신청’을 내면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자식처럼 키운 학교를 ‘헌납’하는 내 마음은 오죽했겠느냐.” 지난 11월29일 영주에서 만난 최 이사장의 일성이다. 영주지역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빚어지는 정원 미달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총대를 멨다고 한다. 그는 운영난을 겪고 있는 다른 학교 설립자들로부터 “4년제 대학까지 갖고 있으니 고등학교는 그만두라”는 압력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부 영주중앙고 졸업생들과 학부모들은 그의 ‘교육보국 의지’를 훼손한 것인가? 이들은 지난해 최 이사장이 교육청에 학교 폐지신청을 하기 전부터 소문만 듣고 반발해오다 폐지신청을 하고 나자 아예 학교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수백명 규모의 대대적인 거리시위까지 여러 차례 벌였다. 그리고 한달 뒤 폐교 승인이 나자 곧바로 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에 들어가 지금까지 법정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영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까지 벌인 동문들과 학부모들의 행동을 설명하기에, 최 이사장의 설명은 어딘가 개운치 않다. 이들은 생업까지 접어둔 채 영주중앙고를 되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다. 12월6일 내려지는 선고를 지켜보기 위해 전세버스를 대절해 대구에 있는 법원에 몰려간 뒤, 선고 결과에 따라 곧바로 대법원까지라도 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 모든 게 과연 모교에 대한 낡은 집착 하나 때문일까.
“영주중앙고 폐지의 본질은 돈이 덜 되는 고등학교 사업을 처분하고 돈이 잘되는 대학사업을 키우려는 사학재벌의 음모다.” 이 학교 동문들과 학부모들의 판단은 최 이사장의 ‘교육보국론’과 거리가 멀다. 학교 통폐합의 속사정이 다름 아닌 돈에 있었다는 얘기다. 그 작업은 최 이사장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유지들과 관료들이 치밀하게 짠 시나리오대로 만들어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쪽기사 참조).
학교통폐합, 밀실에서 추진됐나
사진/ 지난해 10월 영주중앙고 폐교를 반대하며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는 동문들(영주중앙고 총동문회)
영주중앙고 폐지 과정은 영주공업고의 인문계 전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두 학교의 공식적인 통폐합 과정은 먼저 영주공고에서 시작됐다. 2000년 6월 이 지역구 국회의원인 박시균 의원을 비롯해 영주공업고 총동문회 주요 인사들, 시장, 도의원, 시의원 등 55명이 영주공고의 인문계 전환 청원을 경북도교육청에 냈다. 실업계 고등학교 지원자가 갈수록 줄어들어 학생모집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실제 지난해 영주공고는 정원 304명 가운데 70명이 미달이었다. 그러나 영주의 다른 고등학교보다 정원이 100명 가까이 많고 실업계 고등학교의 신입생 감소가 전국적인 추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도교육청 관계자도 “영주공고는 도내 실업고 가운데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도교육청은 지난해 10월2일 영주공고에 신입생 모집을 지시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모집철회 공문을 내려보냈다. 영주중앙고가 폐교신청을 낸 바로 다음날이었다.
영주공고의 인문고 전환은 다른 인문고의 폐교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인문고가 포화상태였기 때문이다. 형식상 영주공업고가 먼저 인문고 전환 청원을 냈지만, 이미 영주중앙고의 폐교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청원서에 서명했던 상당수 사람들은 영주중앙고와의 통폐합 추진은 몰랐다고 밝히고 있다. 박시균 의원도 영주중앙고 총동문회쪽이 지난해 10월23일 확인을 요구하자 “처음 알았지만 정말 이럴 순 없는 일”이라는 답변서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영주중앙고 통폐합 소문은 이미 지난해 초부터 꾸준히 돌고 있었다. 영주중앙고 총동문회와 학부모들이 그해 7월까지 문제를 제기해오자, 최 이사장은 학교재산을 헌납해 ‘단독 공립화’를 추진한다고 약속했다. 최 이사장의 약속에 따라 교직원과 학부모들은 얼마 뒤 단독 공립화를 전제로 한 공립전환 찬성 의견서를 학교쪽에 냈다.
구조조정 근거도 별로 없으면서…
사진/ 영주중앙고 폐교 저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총동문회와 학부모회 회원들.
물론 최 이사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최 이사장은 기자에게 “단독 공립화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 이사장이 도교육청에 폐교요청을 하면서 첨부한 학부모들의 의견서에는 “소문같이 영주공고와의 통합이 되지 않도록 해주시고…”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신청서의 제목은 ‘학교공립화 전환(통합) 인가 신청’이었다. 통합을 전제로 한 공문의 제목에 통합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의견서를 버젓이 끼워넣은 것이다.
밀실 추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는 또 있다. 최 이사장은 “두 학교의 통폐합은 영주시교육발전자문위원회 등 지역 교육관계자들의 모임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추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두 학교 통폐합문제를 다룬 2000년 10월17일 교육발전자문위 회의록에는 직전에 열린 8월18일 회의에서 통폐합문제가 다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시민들에 대한 의견수렴 과정이 생략된 것은 물론, 교육발전자문위 논의도 통폐합 신청이 접수된 뒤에야 진행된 셈이다.
영주중앙고의 통폐합 신청이 접수된 뒤 하루 만에 영주공고의 신입생 모집을 취소시킨 도교육청은 다시 한달도 채 안 된 11월1일 두 학교의 통폐합을 최종 결정했다. 이에 대해 도교육청은 “영주지역 고등학교의 구조조정 필요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민공청회 한번 열지 않고 일을 처리할 만큼 시급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56조는 통합대상 학교 소재지의 지역주민 의사를 고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주중앙고는 한번도 정원 미달을 겪지 않아 이 지역 인문고 가운데 신입생 모집이 가장 수월한 학교였다. 통합대상이 될 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영주지역 학생수급문제도 과장돼 있다. 도교육청은 2001년 신입생이 1년 전보다 138명이 줄어들고, 2004년까지 해마다 100여명 안팎으로 줄어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통폐합의 근거가 된 남자 고등학교의 경우만 놓고 보면, 2004년까지 누적 감소인원은 총 144명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영주지역 전체로 보아도 고등학교당 학생 수는 경북지역 평균보다 34명이 많다. 더욱이 도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2004년부터는 다시 학생 수가 증가해 2007년에는 오히려 2001년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원이 영주중앙고보다 100명 남짓 많은 영주공고가 인문고로 전환함으로써 남자 인문고의 정원이 통폐합 전보다 오히려 크게 늘어나는 결과가 빚어졌다는 사실이다.
재산 안전하게 지킨 최현우 이사장
사진/ 현암학원 최현우 이사장. "교육보국의 일념으로 영주중앙고를 헌납했다"고 말했으나, 헌납한 건 학교이름 뿐이다.
2000년 10월17일 교육발전자문위원회 회의록에는 일부 위원이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통폐합을 추진하면 혼란이 올 수 있다”며 신중론을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 현암학원 최 이사장뿐 아니라 영주시 교육장까지 나서서 두 학교의 통폐합이 한시도 미룰 수 없는 지역사회의 현안임을 거듭 강조한다. 뻔히 보이는 셈까지 애써 무시하며 사학재단과 지역유지, 교육당국이 힘을 합쳐 일을 서두른 것이다.
어찌됐든 최 이사장은 영주중앙고를 떼어내면서도 그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다. 대신 새로 문을 연 공립 영주제일고는 영주공고에 새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2년 동안 무상으로 옛 영주중앙고 건물을 임대해 사용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 이사장은 “풍기읍에 있는 동양대 교정은 접근이 불편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기 부적합하다”며 “2년 뒤 영주중앙고 부지와 건물을 동양대의 평생교육원이나 어학원 등 영주시내 부속건물로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가 그 재산을 내 호주머니에 넣은 것도 아니고 법인에 귀속시켜 대학교육에 재투자하려는 것인데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돈 나오는 기업 하나 없이 오로지 학교를 통해 ‘영주 최고 갑부’라는 말을 듣는 최현우 이사장의 항변이다.
통폐합과정 불법이었다
현암학원이 2000년 10월 부랴부랴 경북도교육청에 영주중앙고 폐교신청을 내고, 도교육청이 영주공고와의 통합 등 복잡한 절차를 한달도 채 안 돼 일사천리로 마무리한 속사정은 무엇일까. 다음해에 차분히 진행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영주중앙고 동문과 학부모들은 사학재단을 폐지할 때 학교터와 건물 등 학교재산을 사학재단에 귀속하도록 한 사립학교법 제35조 2의 조항을 지목한다. 이 조항은 농어촌 영세학교의 폐교를 촉진하기 위해 사학재단 폐지시 학교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한 규정(같은 법 34조1항)을 98년부터 2000년까지 한시적으로 중지시키는 내용이다. 당시 현암학원 입장에서는 ‘내년은 없는 셈’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조항의 시효가 다음해에 재연장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초고속으로 진행된 영주중앙고의 통폐합과 학교재산의 현암학원 귀속 과정이 사립학교법 35조 2의 요건을 전혀 충족하지 못한 불법적 행정처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법 35조 2 제1항은 “고등학교 이하 각급 학교를 설치·경영하는 학교법인은 학생 수 격감으로 그 목적 달성이 곤란한 경우 시·도교육감 인가를 받아 해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제4항은 “해산 인가신청시 첨부한 잔여재산처분계획서가 타당한지 여부를 교육감 산하의 사학정비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주중앙고는 다른 학교들에 비해 학생 수의 격감으로 운영이 곤란한 형편도 아니었고, 도교육청은 사학정비심사위원회 심사도 거치지 않고 재산을 현암학원으로 귀속하도록 결정했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학교 운영의 곤란 여부는 교육감이 판단할 문제이며 사학정비심사위원회를 거치지 않은 것은 학교법인이 해산한 게 아니라 학교법인 아래의 학교 한곳만 해산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도교육청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거꾸로 영주중앙고는 학교법인이 아닌 학교의 해산이기 때문에 특례조항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동문회와 학부모들의 소송을 맡고 있는 이석태 변호사는 “사립학교법 1조(목적)에 따르면 이 법의 주체가 사립학교 각 개체를 의미한다”며 “이에 따라 사립학교법에서 언급한 법인의 해산이란 반드시 법인 전체의 해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사학법인이 2개 이상 학교를 운영하고 있을 땐 학교 한곳을 폐지하는 것은 사학법인 일부를 해산하는 것으로 봐야 하고, 반대로 학교를 설립할 때에도 동시에 두개 이상의 학교를 설립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설립 때마다 관련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현우 이사장, 재테크도 짱!
교육사업가 최현우 이사장은 이재에 밝은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영주시는 97년 10월 풍기읍 창락리 일대 2만9천여평에 공영개발 방식으로 온천 휴양단지를 조성하기로 하고, 같은해 11월부터 부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예정부지의 44%에 이르는 1만3천여평은 토지거래허가지역 지정 직전인 그해 6∼7월에 소유권이 바뀐 것으로 드러났다. 갑자기 주인이 바뀐 이들 땅 가운데 2800여평은 최 이사장 집안이 사들인 것이었다. 나머지 땅은 현암학원 이사로 있는 서아무개(51)씨가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이들 땅은 평당 2만5천∼3만원에 거래되다 영주시에서 사들일 때는 11만∼12만원으로 뛰어올랐다. 불과 몇달 사이에 두 사람이 1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얻은 것이다. 영주에서는 한동안 영주시가 특정인들에게 개발정보를 유출했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한편 지난 5월에는 영주시가 풍기읍 산법리 동양대 부근 6만여평의 사유농지를 땅주인들도 모르게 동양대 시설부지로 묶으려다 뒤늦게 이 사실이 드러나 땅주인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 땅이 학교 시설부지로 묶이면 동양대는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다. 당시 영주시는 땅주인 대신 이들 농지와 무관한 사람들만 불러 공청회를 열고 동양대 시설부지 지정 동의서명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주=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인사이드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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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공화국의 왜곡된 성장배경
해방후 속속 설립된 사립대학은 지난 50여 년 간 우리 나라 고등교육의 일정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우수한 인재양성과 올바른 교육철학을 내세웠던 사학의 설립정신은 어느덧 사라지고 일부 사학의 경우 상식을 벗어난 비리와 전횡을 일삼아 오고 있다. 21세기 대학개혁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대학이 진정 학생들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할 지 냉정하게 돌아볼 때다.
①사학의 그 숨겨진 성장 비밀
"이유 있는 사립대학 분규들"
한국 사학의 성장과정은 지난 반세기 한국 현대사의 질곡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과거 일부 사학들은 각 정권 시기마다 정권과의 위험한 관계를 맺어오거나 또는 설립취지와는 다르게 슬그머니 사유화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립대학 분규의 근간엔 바로 대학을 사유화하며 전횡을 일삼은 '재단'이 있었다는 것이 한결같은 지적이다.
현재 사학분규의 전형으로 최근 교육부 감사에 들어간 덕성여대는 1934년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여사가 설립한 근화학원을 뿌리로 하고 있다. 무궁화를 뜻하는 근화(槿花)라는 교명이 일제시대 덕성으로 바뀐 것처럼 설립자의 민족교육정신은 지난 반세기를 통해 어느덧 사라지고 말았다.
교육부는 지난 97년 덕성여대가 사학의 민주화를 주장하던 한상권 교수(사학과)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을 계기로 학생, 교수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당시 이사장 박원국씨를 해임시키고 이문영씨를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또 함세웅 신부와 방정배 교수를 공익 이사로 파견해 덕성 여대 사태는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 재단 측 이사들과 교수들과의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사퇴하고 말았다.
이사회는 다시 3년 전처럼 박씨 일가 체제로 개편되면서 또다시 대학 분규사태를 재현하고 말았다. 박원국 전 이사장의 소유물로 전락했다는 것이 덕성여대 분규의 본질이라고 교육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대학 사유화의 전형과 결과는 한 족벌 지방대가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한 개인이 돈 한푼들이지 않고 10여년 동안 무려 7개의 사립학교를 세울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자신이 설립한 4개 대학과 3개 고교의 등록금을 횡령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홍하 전 서남대 총장은 교육계에서 악덕재벌의 문어발식 성장모델을 그대로 따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이씨는 자신의 처 서복영과 함께 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사학재벌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등록금을 불법으로 전용하는 수법으로 85·86년에 광남고와 대광여고를 세우고, 91년부터 95년 사이 서남대, 광주예술대학, 광양대학, 한려대 등 무려 4개 대학을 급조 설립했다.
한려대를 세운 95년에는 광주의 남광병원과 적십자병원도 인수하는 등 거대교육·병원재벌로 성장했다.
이씨의 사학재벌 의도는 처음부터 교육철학이 부재한 설립 과정에서 뚜렷이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교를 설립하자마자 이씨는 최소한의 유지비를 뺀 7개 고교·대학에서 횡령한 등록금으로 병원을 인수하고, 경기도 화성군과 충남 아산시, 광주 광산구 일대의 땅매입에 쏟아 부어 자신의 처와 아들의 명의로 올려놓았다.
97년부터 98년까지 한려대의 교비 및 기성회비 총지출 97억1천만원 중 절반이 넘는 58억5천만 원을 땅투기에 쓴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많은 학교를 관리하기 위해 이씨는 4개 대학법인의 총 32개 이사 중 절반을 친인척과 고등학교교사 등 자신의 심복으로 채우고 이사장은 처동생과 매제에게 맡기는 수법으로 족벌체제를 유지했다. 결국 그가 설립한 일부 대학이 폐쇄·계고 조치돼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교수만이 떠 안았다.
'상지대 사태'는 우리 사학재단이 걸어온 아픈 과거의 한 단면이자,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낸 상지대 김문기 전 이사장은 지난 74년 지금의 상지학원의 전신인 성화학원을 인수한 후 줄곧 비리 전횡을 일삼아 왔다.
그는 지난 86년에는 재단비리 분규로 교육부 감사가 임박하자 ‘가자 북의 낙원으로’라는 유인물을 뿌린 용공조작을 시도해 큰 파문이 불러오기도 했다. 93년 부정입학과 관련한 금품수수와 도서관 신축공사비 횡령 혐의로 1년6개월의 실형을 살기도 한 그는 출소 후 5년여 동안 교육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99년 패소판결을 받아 결국 대학에서 '쫓겨' 났지만 지금도 이 대학 정문앞에는 "김문기와 함께 상지대학의 발전을'이란 플래카드를 걸고 대학은 내 것이라는 듯이 암묵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부 사립대학의 성정배경엔 과거 군사정권과의 결탁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학이 정권에 대한 충성의지를 보이거나 친분을 통한 인사의 영입으로 대학을 키운 경우들이다.
한 지방대학의 경우 전두환정권 시절 대통령과 동창인 이 대학 교수를 통해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종합대학으로 승격돼 전두환 재임시절 무려 33개 학과의 신설인가를 받았다.
90년 들어 많은 신생대학들이 출현했다. 이들 대학 중에는 언뜻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게 급팽창한 대학들이 많다. 90년대 초 소규모로 설립된 한 대학의 경우 7년여만에 입학정원이 10배가 늘어난 대규모 대학으로 변모했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증원과 증과의 보증수표인 교수확보율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다른데 있었다. 교수확보의 수급상 진전이 없자 전임강사를 서류상의 교수로 둔갑시키고 해당 관청에 전임교원으로 허위로 보고했던 것이다. 실제로 91년부터 98년까지 모두 54명의 교수를 편법으로 채용했던 것으로 99년 교육부 감사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이 대학은 결국 93년부터 95년까지 신규 채용한 30여명의 교수로부터 20억원의 금품을 받았다는 교수채용 비리 의혹까지 제기돼 교수증원에 의한 외형 성장은 멎게 됐다.
88년 종합대학으로 개편된 또 다른 대학도 89년부터 92년까지 모두 1백20명의 유령교수를 양산하고 교육부에 허위보고 하는 수법으로 90년부터 93년 동안 무려 28개학과 신설인가와 6백69명의 입학정원을 증원 받았던 것으로 93년 감사원의 감사결과 밝혀졌다.
우리 사립대학들의 아픈 과거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유화된 대학, 그 속에 '주인'은 대학을 사고 파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까지 했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산 65번지 일대 65만 평방미터 대지에는 경원대학교와 경원전문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이 대학의 소유권은 지난 98년 9월 25일 학교공금 218억원을 채워주는 대가로 이길녀 이사장의 길병원 쪽으로 넘겨졌다. 당시 대학 재단이사장이 등록금을 개인금고화 했다는 전례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98년 당시 학교법인 경원학원의 이사장은 예음그룹 최원영(47) 회장이었다. IMF구제금융으로 예음그룹의 7개 계열사가 자금난을 겪게되자 최원영 이사장은 학생들의 등록금 2백2억원을 동원해 자신의 회사채를 매입하는데 썼다. 등록금은 휴지조각이 되고 급기야는 대학의 수익용 재산을 매각하기도 했다. 이미 최 이사장에게 대학은 하나의 ‘사고 팔 수 있거나’밑 빠진 기업을 채우는‘ 자금줄’에 불과했던 것이다.
과거에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학재단의 전횡은 결국 그 피해를 학생, 교수와 교직원에게 고스란히 남겨주었고 그 사립대학 재단의 명예는 대학의 고통으로 영원히 남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재단의 냉정한 평가는 여전히 부족하다. 대학 역시 성공한 과거의 전횡은 무죄다라고 외치는 것이 우리사회 교육풍토다. 과거에 그랬듯 이 재단의 교육적 사명감과 도덕성이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는 한 우리 대학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하다.
[필자주]현재 저는 대학문화신문 기자로 재직중이며 이글은 대학문화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사립학교법개정과 사학개혁의 필요성이 어느때보다 절실한 요즘 우리사학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기사를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니리포터의 공간을 빌리고자 합니다.
하니리포터 정웅종 기자 bulddong@hanimail.com
편집시각 2001년06월07일16시49분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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