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義人말살 거래' 피해자들
허위공문서 작성으로 사학재단과의 재판거래 은폐한 이용훈 대법원장
사학비리 맞서다 성추행범 누명 교사 무죄받아
등록 :2005-01-31 19:13수정 :2005-01-31 19:13
“입 다물고 있었더라면 고통은 덜 겪었겠지요.”
지난 27일 대법원은 사학비리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경기 안산시 한국디지털미디어고 국어 교사 김태철(38)(사진)씨에게 무죄를 최종적으로 판결했다. 김씨로서는 1년여만에 악몽에서 탈출한 셈이었다. 김 교사는 “비리 사학재단에 맞서다가 ‘성추행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니 죽고 싶을 만큼이나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김 교사는 지난 2003년 9월30일 국회의 경기도 교육청에 대한 국정감사를 앞두고 사학재단인 한국디지털미디어고의 비리를 국회에 제보했다. 김 교사의 제보 내용은 국회 국정감사에 이어 같은해 10월29일 이뤄진 교육부 특별감사에서도 사실로 확인됐다. 이 학교 이사장은 3천만원을 받고 무자격 교장을 채용하고, 8억여원의 교비를 불법집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또 경기도교육청 공무원을 비롯해 모두 43명이 징계를 받았다. 결국 지난해 1월 경기도교육청은 임시이사를 파견해 학교 정상화 절차를 밟고 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김 교사 자신도 수난의 길’로 들어서야 했다. 같은해 12월 동료 여교사 등이 김 교사를 ‘강제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것이었다. 이를 이유로 학교는 지난 4월 징계위원회를 열어 김 교사를 직위해제했고 같은해 6월에는 파면하기에 이르렀다.
졸지에 ‘내부고발자’에서 ‘성추행 범죄자’로 추락한 김 교사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1년이 넘는 힘겨운 법정투쟁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소송비용과 생계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파트를 팔아 온 가족이 옥탑방으로 이사했고 아내가 병을 얻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지난해 8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같은해 10월에는 교육부의 파면결정 취소로 학교에 복직했다. 지난해 11월 항소심에서도 역시 무죄를 받아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의 그의 결백함을 최종적으로 확인해줬다.
대법원 제1부(재판장 김영란)는 “사건이 일어난 지 2달이 지나 고소한 경위가 석연치 않고 고소인들의 진술이 자꾸 바뀌는 등 일관성이 없고 상호 모순된다”며 “고소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검찰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김 교사의 결백은 아직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다. 1심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인 지난해 9월 이 학교 여학생 5명이 “지난 2003년 김 교사가 국어수업에서 황진이의 시조 ‘어져 내일이야’를 가르치면서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며 “성희롱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김 교사는 “형사소송에서 패소한 옛 사학재단이 학생들까지 동원해 나를 다시 곤경에 몰려고 한다”며 “이 사건에 대해서도 재판부가 진실을 가려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수원/홍용덕 기자ydho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7917.html#csidxd94af6ba8bdb7ed8b3cbc15fbeb5834
한 '내부고발자'의 쓸쓸한 뒷모습
사학비리 양심선언으로 '해직' 당한 김중년씨 이야기
2006-07-26 11:48:57
주말인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김중년씨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 파주에 있는 한 금식기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심신이 지쳤다고 했다. 더 이상 세상풍파에 시달리는 것이 끔직하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내 내뱉는 한숨...
지난 26년 동안 경북 영덕여고(학교법인 조양학원)에서 행정실 직원(6급)으로 근무해 온 김중년(51), 그는 그렇게 조금이라도 세상 꼴을 안보기 위해 기도원으로 피신하다시피 했다.
2004년 12월 1일, 그는 경북 영덕여고 박 모 이사장(구속 후 집행유예 석방)이 지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4년여에 걸쳐 재단 돈 1억1천7백여만원을 횡령한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박 전 이사장(1989년 2월~2004년 3월 영덕여교 교장 재직, 2004년 3월~2005년 2월 조양학원 이사장)은 이 일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1심 재판부는 김중년씨의 제보를 사실로 인정, 박 전 이사장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감독관청인 경북교육청은 조양학원의 기존 이사진을 전원 해임시키고 2005년 2월 25일자로 관선이사진(이사7인, 감사2인)을 파견했다.
사학의 비리를 폭로한 박중년 씨. 그는 이 일로 학교측으로부터 보복성 해직을 당해야했다. ⓒ뷰스앤뉴스
이사장 집 형광등 하나까지 학교 돈으로 사
복사기가 없던 80년대, 김씨는 학생들의 시험 문제지를 등사하는 일을 하는 서무실(현 행정실) 서무보조로 영덕여고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의 나이 25살 되던 1979년 2월의 일이다. 김씨에겐 첫 직장이었다.
김 씨가 영덕여고 서무실에 근무한 지 10여년만인 지난 1989년, 박 전 이사장이 영덕여고 교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후에 안 얘기지만 박 전 이사장의 교장 부임은, 그가 ▲영덕여고와 ▲영덕여중 두 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학교법인 조양학원을 실질적으로 인수했기 때문이었다.
김중년 씨의 증언에 따르면, 영덕여고 교장으로 부임한 박 전 이사장이 맨 처음 한 일은 서무실 직원들을 상대로 사직서를 제출받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박 교장(박 전 이사장)은 "내 말을 안들으면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고 직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그때부터 서무실 서기로 승진해 학교 지출관련 회계업무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금전출납 일을 맡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학교가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고생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박 교장은 공사 및 물품 구입 계획, 납품, 지출 등 학교 행정실이 해야할 주요 업무를 자신이 직접 지시하고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개인적인 쌈짓돈을 만들기 위한 노림수였다. 예를 들어 학교 관련 공사시, 이에 사용되는 공사 물품 단가를 조작하거나 수량을 부풀려 지출하는 방식이다. 박 교장은 뒤에 대금업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그 차액을 되돌려 받는 수법으로 학교 돈을 횡령했다. 물론 학교 회계 장부에는 정상적으로 지급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박 교장은 김중년 씨에게 ‘얼마만큼의 물품을 어떻게 회계처리하라’고 손수 지시했다. 김씨는 이같은 비위사실이 담긴 학교장의 친필 메모지를 간간히 확보해 두었고, 훗날 이 메모지들이 증거물이 되어 박 교장의 주요 비위 혐의를 입증해 내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심지어 박 교장은 자신의 집에 쓸 형광등 하나까지 학교 돈으로 구입했다. 이같은 사실 또한 김씨에게 지시내린 박 교장의 친필 메모에 드러나 있다.
15년의 침묵... 그리고 어느 날의 '고해성사'
김중년 씨는 이같은 박 전 이사장의 크고 작은 비위사실이 그가 조양학원을 인수해 영덕여고 교장으로 부임한 지난 1989년 이후부터, 자신의 양심선언으로 박 전 이사장이 조양학원 이사장 직에서 물러나기 직전인 지난 2004년 말까지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이쯤에서 드는 자연스러운 의문점은 “그가 왜 무려 15년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사장의 비리를 폭로했냐”는 것이다. 그동안 그를 취재했던 기자들의 한결같은 물음이기도 했다.
처음 박 전 이사장과 일하던 10여년동안(1989~1999)은 김씨도 이같은 박 전 이사장의 비위사실을 애써 눈감으려고 했다. 주위 지인들에게 박 전 이사장의 비위 사실에 대해 고민을 털어놔도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원래 사학이 그래”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양심의 가책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비리를 함께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해도, 내가 눈감는 것은 비리를 방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흔들리던 김씨는 용기를 내 2002년 무렵부터 박 전 이사장의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전 이사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의 문제제기를 일축했다. 참다못한 그는 결국 2004년 6월께 박 전 이사장의 비위사실을 정리한 내역서를 영덕여고 선생님들에게 폭로했다.
그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제일 처음 이같은 비위 사실을 알린 것은 교사라는 직업의 '양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어떡하든 학교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차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학에서 교사라는 직책은 회사 내의 일개 직원과 같은 신분이다. 아무리 그의 문제제기가 타당하다 한들, 이사장이 나가라고 하면 하루아침에 밥벌이 수단을 잃는 것이 우리 사학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의 현실이다.
그렇게 그의 ‘양심선언’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고민하던 그는 급기야 2004년 11월 말,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에 박 전 이사장의 비위 사실을 담은 내용을 제보하고 도움을 요청해 같은 해 12월 1일 국회 기자실에 섰다.
선천적으로 말더듬는 김씨 “평생 억눌린 가슴을 안고 살다”
하지만 그가 양심선언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15년을 끌어온 진짜 속내는 다른 것에 있다. 그는 어릴 때 경풍을 앓고 가벼운 뇌손상으로 말더듬이가 됐다. 눈을 자주 깜박이고 말을 자주 더듬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유년시절, 중년 씨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이유도 그의 말더듬는 장애 아닌 장애 탓이다.
말더듬는다고 제대로 된 항변 한번 못해보고 살아온 김중년 씨. 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억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그에게서 자신감을 빼앗아가 버렸다. 늘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만 살아야하는 고통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짐작치 못한다.
그가 지난 15년의 세월동안 침묵을 지켰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혹시나 이사장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말더듬는 놈이 헛소리한다”고 비웃음을 살까, 그는 무엇보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가 박 전 이사장의 지시가 담긴 친필 메모를 차곡차곡 보존해 둔 것도 바로 이같은 말못할 속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양심선언’을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위 ‘내부고발자’로 세상에 맞선다는 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중년 씨의 내부고발로 박 전 이사장은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그는 26년간 일하던 영덕여고에서 쫓겨났다.
박 전 이사장 퇴출 이후, 도교육청은 영덕여고에 관선이사진 9인을 구성해 파견했지만, 여전히 박 전 이사장의 아들은 이 학교 교감자리를 유지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관선이사에 선임된 9명의 이사진이 한결같이 영덕지역 인사들이라는 사실이다. 박 전 이사장과 평소 친분이 있던 인사들도 대거 이사진에 포진했다.
심지어 이사회에 징계요구를 신청할 수 있는 R 현 영덕여중.고 교장까지도 이사진에 포함됐다. R 교장은 박 전 이사장 시절, 박 전 이사장이 친히 영덕여중 교장으로 발령한 그야말로 조양학원 인사인 셈이다.
이같은 기형적 관선이사 구성과 박 전 이사장의 아들이 그대로 영덕여고 교감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놓고 그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판단, 박 전 이사장의 아들 박 모 교감의 사퇴를 촉구하며 박 전 이사장의 비리 사실을 이번에는 경북도육청 홈페이지를 비롯한 23개 시.군 교육청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그는 이 일로 학교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결국 2005년 11월 3일자로 해임됐다.
그를 해임한 관선이사진은 “김씨가 이미 처벌을 받은 박 전 이사장의 비리 사실을 다시 한번 폭로해 학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해임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김중년 씨는 이러한 조치가 박 전 이사장의 비리 사실을 폭로한 보복성 인사라며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진정을 냈다. 지노위는 이에 “(김 씨의 재차 폭로가) 다소 감정적인 면이 있으나 보편적 표현의 자유를 벗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고 재심시 근로자가 반성한 사실이 있으므로... 해고에 이를 정도는 아니다”라며 '부당해고 판정'을 내려 원직복귀를 명했다.
하지만 학교측은 지노위의 판정에 불복,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했고 중년 씨는 아직도 복직을 못하고 있다. 학교측은 더 나아가 중노위 판정에서도 부당해직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법정소송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가겠다는 입장이다.
양심 선언을 하고도 오히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뿐이었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지쳐버린 중년 씨는 잠시라도 세상을 등지기 위해 기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뷰스앤뉴스
“그의 양심 선언이 그를 다시 ‘왕따’로 만들다”
논란의 정점에는 역시 관선이사진 구성이 자리하고 있다. 경북도교육청이 학교측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들을 관선이사로 구성한 그 결정부터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박경양 사립학교개혁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교육청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퇴임 후 달려가는 곳은 십중팔구 사학”이라며 “현재 사학관련 단체나 학교관련 단체의 주요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교육계 인사들이 주류”라며 교육청과 사학간의 공생관계를 지적했다.
길고 긴 중년 씨의 외로운 싸움. 이제 그를 지지하던 주위 사람들도 하나 둘 그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경북 포항의 모 고등학교 행정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의 동생마저도 “뭐 할라꼬 내부 고발인지, 지랄 인지를 했노? 형이 뭐 영웅이가”라며 원망아닌 원망을 했다 한다.
사학비리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서울 금천구 동일여고 3명의 교사 사건처럼, 김씨의 양심선언도 결국 세상의 모진 풍파에 흔적도 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당연한 문제제기조차 못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폐쇄적 문화, 그리고 대한민국 일부 사학의 거침없는 비리 행진에 동일여고 교사들과 중년 씨 같은 우리사회의 ‘옥석’들은 되레 죄인이 돼가고 있다.
평생 말더듬이로 억눌린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중년 씨는, 이 일로 세상에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기도원으로 떠난 그가 하루 속히 마음을 다잡고 세상으로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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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보고 정의는 살아있다 뭐다 하는 등신들에게...
돈 없는 사람들 지쳐 나가 떨어지라고, 판사년놈들이 사학재단과 짜고 재판을 이렇게 지연한다. 5개월, 5개월 5개월= 넉넉 잡아 1년 6개월이면 끝내야 할 재판을 4년씩이나...
유인물 한 장이 바꿔놓은 그의 인생
대학총장 3명과의 길고도 지루한 싸움
01.11.20 10:35l 01.11.21 22:55l박수원(pswcomm)
아주 길고 지리한 싸움이었다. 지난 11월 9일 조춘화(41. 전 국민대노조 위원장) 씨는 해고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는 순간 지난 4년 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요즘 대학들은 총장이 문제'
1997년 10월 2일 오후 2시. 국민대학교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정치인과 대학교수 등 저명한 인사를 초청해 목요 특강을 개최하고 있었다. 이날 목요 특강 연사로 초청된 인물은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4년만에 복직 판정을 받은 조춘화 씨
"4년 동안 싸우느라 흰 머리가 늘었습니다"
ⓒ오마이뉴스 박수원
전두환 신군부 집권을 정당화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입법회의 의원과 노동법 개악 당시 노개위 위원을 지낸 이경숙 총장이 특강을 한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국민대 노조 조춘화 위원장은 190여 명의 조합원들에게 뿌릴 '요즘 대학들은 총장이 문제'라는 제목의 유인물 200여 장을 준비했다.
특히 이경숙 총장은 숙명여대 노조와 3월부터 시작된 교섭을 해태시켜 10월까지 해결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인물에는 숙명여대 총장뿐 아니라 사립대학 가운데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서강대 총장(이상일)과 단국대 총장(장충식)이 거명돼 있었다.실명은 거론하지 않고 학교 이름만 언급한 채 말이다.
"물리력을 동원해 특강을 무산시킬 생각은 없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인사를 목요특강에 데려오라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겠다는 생각이 컸었는데..."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날 목요특강은 취소됐고, 조춘화 씨는 학사행위 방해죄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당시 조춘화 씨는 그 해 6월 대학노조로는 드물게 20일 동안이나 파업을 진행한 전력때문에 학교에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다.
징계위원회 결과는 해고. '해교 행위'와 '명령 불복종에 의한 행정질서 파괴'가 해고 사유였다. 98년 1월 16일 해고가 결정된 이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긴 했다. 재심위원회에서 학교는 구체적인 사과와 그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개인적으로 목요특강 취소에 따른 책임은 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저에게 노조 활동과 외부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노조 활동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데 각서를 쓰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재심위 결과도 역시 원심과 같은 해고. 해고가 확정된 4월 13일부터 조춘화 씨는 비슷한 시기에 재적된 대학원 총학생회장 원동업 씨와 천막 농성에 돌입한다. 원동업 씨는 학내에서 벌어진 교수 성폭행 진상조사와 민주제단체 협의회 구성을 요구하는 등 조춘화 위원장과 함께 학교에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10일째 되는 날 새벽 5시. 대학노조 간부들과 총학생회 간부들이 함께 대책회의 후 잠을 자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보직교수, 학교직원, 수위 등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천막을 에워싸고 칼로 천막을 철거하려고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천막은 30분만에 허물어졌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너진 천막 위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출동한 성북 경찰서 소속 경찰들에 의해 연행됐다.
"성북 경찰서에 연행됐다가 바로 그날 전원 석방됐어요. 경찰서에서도 왜 연행했는지 이유를 잘 몰랐으니까요. 학생들은 학교 요청에 따라 공권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그 사건 이후에 우리 싸움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게 됐습니다."
4월 13일부터 진행된 천막농성은 8월 28일까지 138일 동안 계속됐다. 그 해에는 왜 그렇게 비가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던지 조춘화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물 위에 둥둥 떠서 잠을 잤던 기억 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위에 둥둥 떠서 잠을 잤지만 자신의 싸움에 지지를 보내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천막 농성 당시 노조 위원장 선거를 진행했었죠. 학교에서 내세운 후보가 있었는데 조합원들이 저를 위원장으로 뽑아주더군요. 학교 압력이 만만치 않아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눈물겨운 선거였습니다."
현승일 총장 낙선운동
천막농성 이후에는 부당 해고에 대한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의 구제신청이 진행됐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학교측에 책임이 없다"는 내용. 결국 민사소송을 통해 1999년 11월 25일 1심에서 "해고 처분은 지나치다"는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학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춘화 위원장을 해고시켰던 장본인인 현승일(현재 한나라당 국회의원) 총장은 해고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항소를 하고 4.13 총선을 위해 총장직을 물러났다.
"현승일 총장은 정치적 야심이 많았던 인물입니다. 8년 가까이 국민대학교 총장으로 있으면서 정치대학원을 만들었고 그곳에 정치인들을 대거 데려와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었죠. 아니나 다를까 임기 8개월을 남겨두고 국회로 들어갈 준비를 하더군요. 제 문제는 해결도 하지 않은 채 말이죠."
이후 조춘화 씨는 현승일 총장이 후보로 출마한 대구 남구로 내려가 낙선운동을 진행했다. 총선연대에 자료를 늦게 넘긴 탓에 현승일 씨가 낙선자 명단에서 누락하긴 했지만 대구지역 총선연대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 총선연대와 함께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날이었습니다. 선거 막바지라 그랬는지 지역신문과 방송이 모두 관심을 보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대구 남구 청년당원들이 오더니 불법이라고 기자회견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시도하더군요."
그는 현승일 씨 선거 담당 사무장 고소로 검찰에 명예훼손과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물론 무혐의 처리됐지만 말이다.
해고와 관련된 대법원 선고는 끝났지만 조춘화 씨는 국민대학교 직원과 여전히 법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학교 인사담당 대리 구아무개 씨는 그가 해고 무효 민사소송을 내자 97년 당시 상황과 다른 진술을 하기에 이른다.
인사 담당 대리 구 아무개 씨는 "조 씨가 목요특강 취소를 목적으로 학생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1000부가 넘는 대량 인쇄물을 배포했다"는 것. 조춘화 씨는 구 씨가 재판을 왜곡시켰다고 고소를 했지만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인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뒤바뀌게 됐다.
"위증한 사람은 그대로 두고 저를 무고죄로 조사하겠다는 검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람들이 왜 기를 쓰고 이민을 가려 하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재판도 결국 2001년 4월에 승소했다. 그러나 검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시 항소해 놓은 상태.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된 정성진 총장은 24년간 검사로 재직하면서 중수부장까지 지낸 권력자로 교수 임용 4년 5개월만에 대학총장에 임명된 인물. 정성진 총장은 11월 15일 진행된 이 재판에 구 아무개 씨의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었다.
조춘화 씨는 1명도 아니고 3명이나 되는 대학총장들과 참으로 길고 힘겨운 싸움을 진행했다. 이경숙, 현승일, 정성진. 긴 시간을 보내면서 그 역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해고될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과 딸이 이젠 중3, 중1이 됐습니다. 올해 초 중1 딸이 심장병에 걸려 걷지도 못할 상황이 됐을 때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던 아내가 '여보 그만둡시다'라고 하더군요. 지금이야 딸 상태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때는 복직이고 뭐고 모두 정리하고 싶었죠."
조춘화 씨는 현재 대학노조 사무처장으로 재직중이다. 오랜 해고 생활 가운데 대학노조는 그에게 큰 버팀목이 됐다. 얼굴도 모르지만 후원금을 보내주는 후원인이 있었고, 변호사비 보태라고 1일 주점을 열어주는 동료들이 있어 그는 외롭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봐준 대학노조 동지들과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고맙지요. 대학 당국이 노조 활동가를 함부로 해고시키면 큰 코 다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으로 동지들에게는 감사함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유인물 한 장 때문에 4년 세월을 힘겹게 보내야 했던 조춘화 씨. 힘 있는 권력과 지리한 세월도 그의 신념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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